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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Mar 15. 2022

영종도

2022.03.15

르네 마그리트, <승리> (1939)


태평양을 가로지른 비행기가 일본 상공을 지날 때쯤 <알쓸신잡 3> 강화도 편을 보기 시작했다. 강화도는 서울로 진입하는 한강 하구의 관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다. 1866년에는 프랑스 함대의 침공으로 병인양요가, 1871년에는 미국 함대의 공격으로 신미양요가 발생한 지역이다. 절대적인 화력의 열세로 인해 조선 수비군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신미양요의 격전지인 광성보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둘러보던 김상욱 교수의 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조선 말기 강화도의 비극은 1875년 운요호 사건으로 이어졌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 해협에 침입하면서 포격전이 일어난 것이다. 교전 중에 일본군은 강화도 인근의 영종진(永宗鎭)을 공격해서 큰 피해를 입힌다. 이듬해인 1876년에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고, 그동안 쇄국정책을 펼쳤던 조선은 굳게 걸어 잠근 문을 열게 된다. 한국과 세계를 잇는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이 위치한 영종도(永宗島)에 그런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에 비행기는 이미 한반도 상공을 진입하고 있었다. "곧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이니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시길 바랍니다"라는 안내와 함께 코로나19 검역 절차에 대한 기내방송이 이어졌다. 관련 서류를 사실대로 작성해서 제출해야 하고, 정부의 방역지침을 위반할 시에는 출입국관리법에 의거하여 강제퇴거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처음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영종도의 역사를 배우고 나니 그 내용이 다르게 다가왔다. 운요호 사건으로부터 15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판데믹이라는 전세계적 위기 가운데에서도 법과 원칙에 따라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며 타국과 교류를 이어가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변모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여전히 주체사상을 내세우며 문을 굳게 걸어 잠근 북한을 생각하니 그 역사의 무게가 극명하게 느껴진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닫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지키는 것은 대인관계에도, 국제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고민이다. 문을 열면 풍성한 삶과 다양한 경험을 누릴 수 있지만, 동시에 원치 않는 영향에 노출될 수 있다. 판데믹 이후로 이른바 '코로나 청정지역'의 지위를 유지하던 남태평양의 통가가 지난 1월 15일에 해저 화산 폭발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유입을 우려해서 국제사회의 구호 지원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렇듯 도움을 받아야만 할 때도 난감할 수 있는데, 각자의 이익과 감정과 계산이 복잡하게 얽히는 수많은 상황이 어렵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다.


요즘처럼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물론 코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조지 오웰은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요구된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어떤 지각변동이 발생하고 있는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방 세계에 문을 활짝 열려고 하던 우크라이나는 이를 저지하려는 푸틴의 침공에 맞서 결사항전을 펼치고 있고, 미국은 중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경제적 주도권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에 대응해서 가치 중심의 동맹을 중심으로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를 구축하고 있다. 일본은 러시아 제재 대열에 합류했고, 독일은 군비 증강을 선언했다. 이 와중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하여 중국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21년 1월 21일,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이런 글을 남겼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실패했더라면 2차대전 후의 세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상하기도 힘듭니다. 루즈벨트 못지 않게 엄청난 도전 앞에 직면한 바이든 대통령이 실패한다면? 아마도 미국뿐 아니라 세계가 대단히 힘들어질 것입니다. 1930년대로의 회귀를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계사적인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어떻게 문을 닫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코로나19 판데믹이 지나간 후에도 이 질문을 자주 마주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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