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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May 31. 2021

오늘 세상의 사고 현황

2018.12.31


어릴  차를 타고 서울 시내를 지나가면서  밖을 보며 매번 이상하다고 느꼈던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주요 도로를 따라 설치된 “어제의 시내 교통사고전광판이었다. 어제 하루 동안 교통사고로 서울에서만  명이나 다치고,  명이나 목숨을 잃었는지 정확히 알려주는 무덤덤한 숫자  개가 항상 눈에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전광판에 쓰인 숫자를 바꾸는 것도 분명 누군가가 해야 했던 일이다.


물론  숫자에 감정적으로만 반응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어떤 사고가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 통계를 수집하면,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대책을 세워서 사고의 빈도를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광판을 시내 곳곳에 설치함으로써 모든 운전자에게 경각심을 잠시라도 불러일으키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정보를 관리하는 업무가 일상이 되더라도, 마음이 완전히 무뎌질  있을까. “사망자옆에 쓰인 숫자에는 늦은 시간까지 회식을 견딘 후에 택시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핸드폰으로 아이들의 사진을 뒤적이던 어떤 직장인도 있었을 것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학원에서 걸어 나와 신호가 바뀐 것을 곁눈으로 확인하고 친구의 문자를 보며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하던 어느 학생도 있었을 것이다. “부상자옆에 쓰인 숫자에는 아이에게 해줄 저녁 식사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시장을 보고 나오는 길에 급하게 어디론가 향하던 배달 오토바이에 치여서 평생을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는 어떤 부모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극 하나하나를 마주하면서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을  있을까.




모든 사람의 생명은 이토록 취약하다. 예기치 못한 일로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고, 실제로 무너진다.


2016년 5월 17일, 한 여성이 서울 강남역 부근의 노래방에 친구들과 놀러 갔다가 화장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2018년 12월 20일, 신병 교육을 끝낸 아들 면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차가 가로수를 들이받아서 일가족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같이 탑승하고 있던 여자 친구의 소지품 중에는 아직 읽지 못한 남자 친구의 편지 10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故 윤창호 군은 친구와 함께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가 갑자기 돌진하는 음주운전 차량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故 김용균 군은 입사 3개월 만에 기본적인 안전 수칙이 지켜지지 않아 일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 외에도 보도되지 않고, 공론화되지 않은 많은 죽음들도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이 자신에게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은 아무도 할 수 없다. 교통사고의 피해자도, 강력 범죄의 피해자도, 갑작스러운 질병에 쓰러지는 모든 사람도 그날 아침에 일어나며 자신에게 일어날 일들을 상상했을까. “설마”라는 걱정을 가끔은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오늘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마음에 지니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큰 사회적 논란과 반향을 일으켰던 2018년 10월 14일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해자의 담당의 남궁인 의사의 글 일부를 인용한다.


이렇게 인간을 거리낌 없이 난도질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고인은 평범한 나와 같아 보였다. 환자를 진료하고 돌아가는 퇴근길에 불쑥 나타나는 칼을 든 사람을,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목덜미와 안면을 내어주는... 그것은 밥을 내던 식당 주인일 수도 있고... 고객을 응대하던 은행 직원일 수도 있고... 그렇게 직업상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집에 돌아가던 여러분일 수도 있다.




멀리 있는 곳에서도 비극이 이어지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미국 국경을 넘다가 국경순찰대에 체포되었던 8살의 남자아이가 구금소에서 고열 증세를 보이더니 지난 성탄절 아침에 인근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정확한 경위는 아직도 조사 중이지만, 국경순찰대에 아버지와 함께 체포된 7살 여자아이가 목숨을 잃은 지 불과 2주 만의 일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있다. 간신히 탈출했더니 인신매매로 중국의 한 농촌에 팔려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온갖 폭행과 비인간적인 수모를 겪다가 아이를 낳기 전에 중국 공안에 적발되어 강제로 북송되고, 북한의 구류장에서 갓 태어난 아이를 보위성 요원이 바닥에 엎드려 놓고, 그 아이가 숨도 쉬지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힘없이 지켜봐야만 하는 여성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하자마자 비참하게 소멸되는 생명이 얼마나 많은지 알 길이 없다.


 아이의 생명보다 자신의 생명이  가치가 있다고,  값지다고 자신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어떤 기준으로 봐도 도저히 그렇다고   없다.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아인슈타인의  구조나 질량보다도, 그와 동일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목화밭과 열악한 조건의 공장에서 착취당하며 살고 죽어갔다는 거의 확실한 사실에 관심이  간다 말을 남겼다. 가장  비극은 천재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수많은 인재가 시대를 잘못 만나서 자신의 뜻과 재능을 펼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아직까지 살아남은, 아직까지는  세상의 생명이 허락된 사람들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거창하고 도저히 실체가 잡히지 않는 이 막연한 질문은 사실 “오늘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와 전혀 다르지 않고, 이 질문은 또한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와도 전혀 다르지 않다.


한 방법은 오로지 지금 현재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한 17세기 시인을 인용하며 "카르페 디엠"할 것을 호소한다. 단순하게 해석하면 “욜로” 정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실은 눈 앞의 순간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라는 고귀한 명령이다.


그렇지만  순간의 낭만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도스토옙스키는 <백치> (1869)에서 주인공인 미시킨 공작의 입을 빌려 본인의 경험을 독자에게 전한다. 젊은 시절에 반체제 조직에 연루된 도스토옙스키는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다. 어느 , 그는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 정확히 모른 채로 광장에 끌려나간다.  앞에는 총을 장전한 군인들이 줄을 지어 서있었다. 가장 앞에 있었던 죄수 3명은 이내 말뚝에 묶이고, 그들의 머리 위로는 눈까지 가리는  두건이 씌워진다. 상황을 파악한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시간이 5 정도 남았다는 것을 짐작한다.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이기에,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고민해서 남은 시간을 활용한다. 2 동안은 친구들에게 속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2 동안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성찰하고, 마지막 1 동안 남은 생각을 정리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다가 죽음을  앞에  시점에 기적적으로 사형 선고가 취소된다. (실제로는 당시 차르인 니콜라이 1세가 반체제 세력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하기 위해 이러한  집행 정지를 사전에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영원과도 같은 엄청난 선물이 주어진 그도 세월이 지나며 어느새 게을러지고,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며 남은 여생을 허비한다.


인간이 이런 존재라면, 우리는 주저앉아서 염세주의의 포로가 되는 수밖에 없는가. 아무리 원대한 꿈과 희망이라도 어차피 필시 어느 고대 왕국의 폐허처럼 무너지거나 잊힐 것이니 괜히 고생하지 말고 아무런 시도도 하지 말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카뮈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할만한 유일한 철학적 질문은 바로 우리가 왜 삶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가의 문제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우주 속의 "창백한 푸른 점"인 지구는 수십억 년 후에 적색 거성으로 팽창하는 태양으로 인해 인류의 생존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된다. 물론 그전에 핵전쟁이 발발하거나, 기후변화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고 인류가 더 이상 지구에서 생존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결코 낮지는 않다.




언제나 그렇듯이 유일한 정답이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손을 내려놓고 가만히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에 대해서 무책임한 태도라고 느껴진다. 우리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지금 살아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리고  기적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것이고, 우리가 함부로 대할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그리고 염세주의는 하등의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침마다 눈을 뜨고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마주해야 하는가. 세월호 사고 희생자를 추모하고, 생존 학생을 위로하기 위해 작곡한 "아직, 있다."에서 루시드 폴은 이렇게 노래한다.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Ode on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 (1804)에서 비슷한 구절을 찾을 수 있다.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 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u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우리는 순간의 가벼움 앞에서 무너지고, 생명의 취약함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이라도 하루하루의 순간 속에서 영원을 바라보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 영원 속에서 조그만 위로라도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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