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 뼘

2025.05.19

by 나침반
2025.04.27

다급히 페이지를 넘기며 판결문을 훑어봤지만, 교수님이 질문하신 내용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봄학기 중간쯤이었다. 수업에서 한 연방 대법원 판례에 대해서 배우고 있었다. 교수님이 강의 중에 보충의견에 대한 질문을 하셨고, 학생 두 명이 연달아 대답을 못 하자 세 번째로 이름이 불렸다.


보통 다수의견이 선례로 남기 때문에 수업에서는 다수의견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반대의견이나 보충의견을 위주로 강의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래서 주로 다수의견만 예습하고, 교과서에 간략하게 실린 반대의견이나 보충의견은 대략적인 내용만 파악해서 수업에 가는 날이 많았다.


보충의견의 한 구절에 대한 자세한 질문을 하시지는 않으리라 예상하고 방심했다. 당황한 표정으로 답을 찾지 못하며 헤매던 중에 다른 학생이 손을 들었고, 교수님이 바랐던 내용을 정확하게 답했다.


수업을 마치고 다시 읽어보니 조금만 더 시간을 들여서 준비했다면 바로 답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비록 보충의견의 일부였지만, 학기 후반에 배운 내용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개념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보면 교과서의 저자도 아무 이유 없이 보충의견을 3-4 페이지가 넘도록 유난히 길게 발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이 대답을 못 해서 그런 걸까. 그 보충의견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충분히 예습해서 교수님의 질문에 바로 답했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명확하고 공개적인 실수를 했기 때문에 더 확실하게 배울 수 있었다.


로스쿨 1년 차를 마친 지 어느새 보름이 넘었다. 성적에 대한 압박이 가장 큰 시기지만 배운 내용으로 보면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실무 경험도 없을뿐더러 1년 차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누군가에게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도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 1년 동안 되도록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이 작지 않았다. 충분히 준비되고 자격이 있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만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준비되지 않았을 때만 성장할 수 있고, 성장을 해야 비로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실수를 저지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으면 좋겠지만, 자신으로 인해 생긴 피해를 직시하며 인간관계를 가꾸는 법을 배우는 것도 성장의 한 부분이 아닐까.


이제 곧 한 달간의 휴식을 마치고 첫 인턴십을 시작한다. 처음으로 실무 경험을 하게 되는 셈이다. 이번 여름도 한 뼘 더 성장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종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