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3
가장 좋아하는 저자 중 한 명인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이 있다. 몰디브 인근의 해역에서 잡힌 한 마리의 참치가 어떻게 영국에 있는 가정의 식탁 위에 오르는지, 그 모든 과정을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한 대목이다. 루시드 폴의 노래 "고등어"를 영국식으로 표현한 글이라고 생각하면 될듯하다.
어부의 손으로부터 비행기까지, 복잡한 비행 항로를 따라서 영국까지, 공항에 착륙한 후에 시장까지, 해산물 코너에서 누군가의 손에 들려 집까지, 그리고 부엌에서 조리되어 포크에 찍혀서 어떤 아이의 입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을 사진과 함께 빠짐없이 서술했다. 비행기도 마치 88 대로, 중부내륙고속도로처럼 명칭이 정해진 영공의 항로를 따라간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이 글을 읽고 나서부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뒤에 숨겨져 있는 구체적인 과정에, 그리고 그 단계마다 일어나는 일과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관심을 예전보다 조금은 더 가지게 되었다.
2009년 말, 학부 지원서를 작성하면서 9살 때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라는 다소 진부한 주제에 대한 에세이를 썼다.
성탄절을 앞두고 장난감을 대량 생산하는 공장의 노동자, 그 장난감을 매장으로 운송하는 물류업체 직원, 그리고 오로지 자녀의 행복을 위해 그 장난감을 구매해서 정성스레 포장하고 숨겨두는 부모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모든 사람이 함께 쓴 이야기가 산타 할아버지와 사슴들의 동화보다 훨씬 감동적이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산타가 없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의 충격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오히려 그 순간부터 더 아름답고 따뜻한 현실에 조금씩 눈을 뜬 것 같다.
적지 않은 전문가의 예측을 뒤엎고 불과 1년 만에 백신이라는 선물이 인류에게 주어졌다. 공중보건 인프라가 취약한 개발도상국은 여전히 갈 길이 멀고 변종 확산의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지만, 코로나 19라는 이 길고 고통스러운 터널 끝의 빛이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요즘이다.
백신을 맞으러 갈 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팔을 소독하고, 삼각근에 주삿바늘을 놓고, 그 상처 위에 반창고를 붙이는 의료진뿐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백신을 연구하고 개발한 과학자, 임상시험 참가자, 그동안 사투를 벌이며 필사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지킨 의료진과 응급대원과 보건당국의 공무원, 그리고 방역지침을 묵묵히 준수한 수많은 시민이 있다.
이처럼 백신뿐만 아니라 소독제와 주삿바늘을 포함한 다양한 물자의 생산부터 운송까지, 그 모든 보이지 않는 과정과 노력이 없었다면 백신 접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2014년에 발생한 에볼라 유행 사태 당시 서아프리카로 파견되었던 미군이 국내 코로나 19 대응에도 투입되었다. 지난 3월 6일, 미 국방부는 연방 재난관리청(FEMA)의 요청에 따라 총 6,235명의 병력을 연방 접종 시설에 배치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존 커비 국방부 대변인은 총 2,200명이 캘리포니아, 뉴저지, 텍사스, 뉴욕, 버진 아일랜드, 펜실베니아, 플로리다, 일리노이,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이미 배치되었으며, 수주 내로 오하이오와 조지아 주에도 병력이 추가로 배치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을 들으면서 냉전 초기의 한 사건이 떠올랐다. 1948년 6월 19일, 소련은 동독에 둘러싸인 서베를린을 봉쇄하는 조치를 하나씩 단행하기 시작했다. 이내 모든 육로가 사실상 전면 폐쇄되었다. 당시 서베를린에는 36일 치의 식량과 45일 치의 석탄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의 남한산성처럼 철저히 고립된 것이다.
서방 국가들은 미국과 영국 점령 지역으로부터 동독으로의 철도 운행을 금지하는 등 보복 조치를 실시했지만, 풍전등화와도 같은 상황의 서베를린을 살릴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에 미국과 영국은 공군 수송기로 식량, 생필품, 의약품과 필수 물자를 서베를린으로 공급하는 이른바 베를린 공수작전(Berlin Airlift)을 6월 26일에 개시했다.
이 작전은 1948년 6월 26일에 미군 C-47 수송기가 서독 지역의 공군 기지에서 이륙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49년 9월 30일까지 실시되었다. 모든 수송기가 동독 상공을 통과해야 되는 만큼, 만약 소련이 수송기를 하나라도 격추했다면 전면전으로 번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지속된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공군 외에 호주의 공군도 일부 참여했다.
소련과 서방 국가와의 협상이 타결되면서 서베를린의 봉쇄는 1949년 5월 12일 0시 1분에 종료되었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충분한 물자를 비축하기 위해 그 후에도 네 달이 넘도록 작전이 이어졌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송기가 총 28만 회 출격했으며, 한 전문가의 추산에 의하면 작전 수행 중 누적된 총 비행 거리는 무려 148,000,000km다.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에 육박하는 엄청난 수치다. 작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30초마다 수송기가 서베를린에 착륙했다고 한다.
이토록 서방 국가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살아남은 서베를린은 1961년 8월 13일, 동독 정부가 국경을 폐쇄하고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고립된다. 2013년 여름에 베를린에 들렸을 때 하룻밤 사이에 동네 이웃과 속절없이 단절된 베를린 주민의 당황한 모습을 기록한 사진과 영상을 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시철조망과 콘크리트로 1차 장벽이 건설된 이후에도 추가 증설이 진행되었고, 서베를린과 동독 사이에는 발각 즉시 사살되는 "죽음의 구역"(death strip)이 형성되었다.
존 F. 케네디는 이렇게 다시금 고립된 서베를린에 찾아와서 1963년 6월 26일에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라는 한마디로 결연한 연대를 단호하게 선언했고, 로널드 레이건은 1987년 6월 12일에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이 장벽을 허무시오"라고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1989년 11월 9일, 그 누구도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25년이 넘도록 서베를린의 숨통을 조이던 장벽은 거센 파도와도 같은 역사의 흐름 앞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베를린 장벽이 해체되면서 장벽의 부분들이 세계 각지에 기증되었다. 서울 시내의 청계천 일대에도 장벽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이는 그저 어떤 신기한 물체가 아니다.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소련이라는 독재체제의 현실, 그리고 그 억압적인 체제도 소멸시킬 수 없던 자유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현재와 미래 사이를 가로막는 코로나 19라는 이 장벽도 결국 사라질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이 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삶을 지탱해준 모든 사람들을, 그 강고한 장벽을 조금씩 깎아낸 모든 수고를, 그리고 그 사이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의 일생의 무게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마치 세계 각지에 흩어진 베를린 장벽의 잔해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이 시기를 가끔이라도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여전히 너무 많은 것이 불확실한 요즘이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이 시기가 지나간 후, 우리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