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침반 Jun 19. 2021

제노비스에게

방관자, 돕는 자 (2019.01.10/2021.06.19)

2019.09.22


2011년 10월 13일 오후, 중국 광둥성 포산시에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내리기 시작한다. 2살의 여자아이 웨웨는 엄마가 빨래를 급히 걷으러 간 사이에 오빠를 찾아 사람이 북적이는 좁은 시장길로 걸어 나왔다가 승합차에 치여서 쓰러진다.


이 승합차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도주한다. 그 후의 7분 동안 행인 18명이 길 가운데 쓰러져 있는 웨웨를 지나치고, 그중 일부는 잠시 발길을 멈췄다가 다시 갈 길을 간다. 설상가상으로 트럭 한 대가 아이의 다리를 밟고 지나간다. 결국 폐지를 줍던 한 50대 여성이 웨웨를 발견하고 이미 중상을 입은 아이를 길 옆으로 옮긴다. 딸을 찾으러 황급히 달려오는 엄마의 모습까지, 이 비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스란히 CCTV 영상에 포착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분석을 하려는 시도조차도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 18명의 행인이 무슨 생각으로 지나쳤는지, 사건의 총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3개의 관점에서 조심스레 살펴보며 추론을 할 수 있다.




첫째.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되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아노미"의 개념을 사용한다. 그는 어떤 사회가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 도시화된 산업 사회로 전환하면서 공통된 가치관이 붕괴한다고 분석했다. 이로 인해 근대 사회에서는 개개인이 혼란에 빠지고, 목표의식을 상실하고, 깊은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다고 진단한다. 이 상태가 바로 "아노미"다.


위의 사례에 "아노미"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1978년에 덩샤오핑의 집권 아래 시작된 개혁개방으로 인해 도시화와 산업화가 유례없는 속도와 규모로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전통적 가치관에 급격한 혼란이 찾아왔고, 공적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면서 서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의식이 희석된 탓에 아무도 웨웨를 돕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둘째. 사회적 상황의 구조가 사람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에서는 "방관자 효과"의 개념을 제시한다. 이를 처음 연구한 심리학자 존 달리와 빕 라타네는 1964년에 뉴욕에서 일어난 한 살인사건의 소식을 접하고 연구를 시작한다. 키티 제노비스라는 한 여인이 적지 않은 주민이 살고 있는 아파트 건물 밖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했다.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파트 주민 중 아무도 즉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보도했던 뉴욕 타임스는 2016년의 기사에서 당시의 보도가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범죄의 전부를 자세히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시간이 지난 후에 주민 두 명이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여전히 방관자 효과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달리와 라타네는 방관자 효과를 실험으로 입증하며 이른바 "책임의 분산"때문에 방관자 효과가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누군가가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확률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많다. 하지만 이 중 주된 요인 중 하나가 "상황을 목격한 사람의 수"라고 분석한다. 예를 들어 명동 한복판에서 누군가가 쓰러질 때보다 골목길에서 혼자 걸어가다가 앞에 있는 사람이 쓰러졌을 때,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도움을 요청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목격자가 많을수록 그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욱 분산된다는 이론이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무도 웨웨를 돕지 않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셋째. 게임이론의 핵심 개념인 내쉬 균형으로 이 현상을 분석할 수도 있다. 게임이론에서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분석의 틀은 이렇다. 모든 게임에는 2명 이상의 행위자가 있다. 각 행위자마다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이 2개 이상 있다. 모든 행위자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서 각 행위자가 얻는 효용이 결정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타인의 선택이 자신이 얻는 효용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2명이 하는 가위, 바위, 보에서는 2명의 행위자가 있고, 각 행위자마다 3개의 선택이 가능하다. 자신이 이기는지, 지는지, 비기는지는 상대방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이 개념을 토대로 내쉬 균형을 정의할 수 있다. 내쉬 균형에서는 그 어떤 행위자도 독단적으로 자신의 선택을 바꿈으로써 자신이 취하는 효용을 늘릴 수 없다. 다른 행위자들의 선택을 고정했을 때, 자신이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더한 이득을 볼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방관자 효과"가 일어나는 상황을 게임이론의 틀에서 바라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제노비스 사건처럼 어떤 아파트 밖에서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모든 주민에게는 두 개의 선택이 있다. 경찰에 신고하거나, 신고하지 않을 수 있다. 신고를 한다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비용이 발생한다. 신고를 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관점에서는 아무런 비용을 부담하지 않는다.


이때, 아무도 신고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할 수 있다. 경찰이 신고를 접수하고 출동하는 경우에 얻는 이득이 신고를 하는 비용보다 작다고 가정하면, 각 주민의 입장에서는 굳이 비용을 치르면서 신고를 할 필요가 없다. 즉, 모든 주민이 신고를 하지 않는 상태는 내쉬 균형을 형성한다.


길 위에 쓰러진 웨웨를 본 18명은 신고를 하면 굉장히 번거로워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지나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모든 인간은 선택을 할 때 오로지 자신이 얻을 효용만 고려한다는 철저히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초두에 언급한 사례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2016년 9월 9일 새벽 4시경,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5층짜리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 건물의 원룸에 거주하던 28살의 성우 지망생 고 안치범 씨는 화재를 신고한 후 다시 건물로 들어가서 일일이 초인종을 누르며 주민을 모두 대피시켰다. 이 과정 중에서 안치범 씨는 연기에 질식해서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안타깝게도 9월 20일에 세상을 떠났다.


아노미, 방관자 효과, 게임이론 중 어느 하나도 그의 선택을 쉽게 설명할 수 없다. 50년 동안 급속도의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도 적지 않은 사회적 변화를 겪었으며, "아노미"와 유사한 상황이 존재한다는 해석은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다시 위험한 건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건물에는 총 21개의 원룸이 있었으니 "책임의 분산"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리고 자신이 얻을 기대 효용(expected utility)의 시각으로 그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고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대한 모독과 거리가 멀지 않다.




웨웨와 고 안치범 씨. 이 두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목전의 위급 상황에 대해서 어떤 선택을 할 지의 문제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어떤 사회적인 문제를 인식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뒤르켐은 현대 사회에서 가치관의 혼란과 공적 윤리의 공백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또한 방관자 효과와 "책임의 분산"을 사회 전체에 적용할 수도 있다. 모두가 문제라고 인식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서지 않는 모순적인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냉철하게 계산하는 소위 "호모 이코노미쿠스"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어떤 선택을 고려할 때 머릿속으로 손익계산서를 전혀 채워보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 세 이론적 시각이 비추는 인간의 모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침묵과 방관은 편하고, 소리를 내어 행동을 취하는 것은 힘겹다. 전자보다 후자가 더 번거롭고, 실제로 대다수의 사람이 많은 경우에 전자를 택한다. 그들이 유별나게 냉담하거나 비정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만 집중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 있을까. 일상 속에서 눈 앞의 일들을 헤쳐나가는 것조차도 벅찬 사람이 부지기수다.


도우려고 용기를 가지고 나섰다가 괜한 오해를 사고 피해를 보는 것이 두려워서 가만히 있는 이들도 종종 있을 것이다. 타인의 무관심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누군가가 처해있는 구체적인 상황을 모르면서 정죄할 수는 없다. 관심과 행동을 강요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웨웨의 죽음이 중국 사회에 가져온 충격도, 고 안치범 씨의 안타까운 죽음이 한국 사회에 준 울림도 결코 작지 않다. 사회적 공분을 자아내는 소식은 오늘도 각 신문의 1면을 채우고 있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이런 소식은 예외 없이 우리에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주위에 대한, 세상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말라고 호소한다. 자신에게 실망하는 경우도 수도 없이 많겠지만, 그래도 여력이 되고 생각이 날 때마다 그 끈을 다시금 붙잡아보는 것은 어떨까.


꼭 거창한 일을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고 안치범 씨처럼 귀감이 되는 사람들도 항상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30년이 넘도록 아동을 위한 프로그램 <미스터 로저스의 이웃>을 진행한 프레드 로저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그의 일생은 2019년에 톰 행크스 주연의 <어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돕는 자들을 바라보렴. 언제든 돕는 사람들은 있단다... 그들을 바라보면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어."




철저히 혼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모두가 서로에게 복잡다단한 방식으로 얽혀있다. 그 현실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존하며 살아간다. 너무 엄격하고 이상적인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남의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넬의 노래, "Dear Genovese"의 가사다.

다가가려 했지만 다리가 얼어붙어 멈춰 서 버렸지
타인의 눈을 통해 바라보며 나의 눈을 감아버렸어

난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난 적 없다는 듯
가면의 뒤에 숨어 외면하고 있어

나에게 용기를 줘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그 힘을 내게 줘

짙은 어둠 속에서 날 잃어가고 있어
너의 그 횃불을 들어 내 길을 밝혀줘
매거진의 이전글 살아있는 자들 중에 선한 이가 없으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