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침반 Jun 17. 2021

살아있는 자들 중에 선한 이가 없으니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 (2018.12.07)

미국이 9/11 이후에 탈레반 정권이 통치하는 아프가니스탄을 알 카에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공격한 지 17년이 되었고, 소련이 아프간 공산주의 세력의 내부 분열을 저지하겠다는 의도로 군사적 개입을 시작한 지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최근에 언급했듯이 거의 40년이 지났다. 그 개입으로 촉발된 내전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강대국의 치열한 지정학적 경쟁은 150년이 넘게 지속되고 있다. 해양 세력인 대영제국은 인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로, 대륙 세력인 제정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통해서 영국령 인도를 점령하기 위해 뚫어야 하는 장애물로 아프가니스탄을 인식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1880년부터 19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한 압둘 라만 칸은 러시아가 아닌 영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현재 파키스탄과 아프간의 국경을 형성하는 Durand Line은 영국이 인도의 군사적 방어를 위해서 능선을 따라 그린 경계선이다. 수도인 카불 근처의 국경이 움푹 파인 것은 영국이 유사시 신속하게 개입하기 위해서 설정한 것이라고 한다.


2차 대전 직후에 영국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그리스와 터키에서 발생한 사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당시 미 대통령인 트루먼은 냉전 초기인 1948년에 공산주의의 확장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다. 1950년 6월에 미국이 한국전쟁에 대응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 동시에 해양세력인 영국의 지정학적 역할을 미국이 계승하고, 소련은 제정 러시아와 동일하게 대륙세력으로서 영향력을 확장하려 했다. 미국은 1949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형성해서 소련이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저지하고, 1955년에 터키, 이라크, 이란, 파키스탄으로 중앙조약기구(CENTO)를 형성해서 소련이 남하하는 것을 견제하고, 1954년에는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통해서 동남아시아에도 저지선을 구축한다.


NATO만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지만, 이 3개의 군사동맹으로 방패막을 만들어서 소련을 견제하려 한 미국의 전략은 대영제국이 제정 러시아를 상대로 계획한 지정학적 전략과 상당히 유사하다. 미국은 또한 국제 무역과 에너지 공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와 중동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 해협을 방어하는 데 집중한다.




냉전 초기부터 미국과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경쟁적으로 개발 원조를 제공한다. 1960년대에 카불은 “중앙아시아의 파리”로 불렸었고,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도시였다. 잠시나마 민주주의적 요소를 갖춘 헌법이 제정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일련의 사태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1973년에 다우드 칸이 무혈 혁명으로 권력을 차지하며 아프간 공화국을 선포한다. 이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세력인 아프간 인민 민주주의 정당(PDPA)은 1978년 4월에 군사 혁명을 일으키고, 이 과정에서 다우드 칸이 암살된다. PDPA의 한 분파인 Khalq는 무력을 동원해서 토지 개혁을 시도하고, 상당히 보수적인 농촌 지역에도 양성 평등을 포함한 급진적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한다. PDPA의 온건파인 Parcham과의 내분이 격화되고, 사회 개혁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며 아프간 곳곳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한다. 이에 Khalq 분파 내의 지도자 사이에 경쟁도 가중되며 정치적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끝내 1979년 12월에 소련은 군사적 개입을 결단한다.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혁명으로 인해 이란에 반미 성향 정권이 들어선 지 불과 10달 후다. 이러한 정세의 급격한 변화로 페르시아만이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설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1980년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 불참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사우디 아라비아와 협력해서 파키스탄의 정보기관인 ISI을 통해 아프간 내의 반군 무장 세력에게 자금과 휴대용 대공 미사일 등 무기를 지원한다.


훗날 알 카에다의 지도자로 1998년 탄자니아와 케냐의 미 대사관 폭탄 테러, 2000년 미국 군함 USS Cole을 겨냥한 폭탄 테러, 그리고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공격을 계획한 오사마 빈 라덴도 바로 이 시기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반군으로 활동한다.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로 집권하게 되고, 1989년 2월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다. 정치 개혁인 글라스노스트, 경제 개혁인 페레스트로이카뿐만 아니라 10년 동안의 아프간 참전으로 인해 국력이 소진되고 국내에서 불만이 누적된 탓에 소련의 붕괴가 가속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소련이 철수한 이후에 1996년까지 내전이 이어지고, 1996년부터 2001년까지 탈레반 정부가 집권한다. 2001년 9/11 테러 이후에 미 부시 행정부는 폭넓은 국제적 지지를 기반으로 신속하게 군사적 행동을 개시해서 탈레반 정부를 격퇴한다.


2001년 12월에 임시 정부가 설립되고, 2004년의 전국 선거에서 하미드 카르자이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201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아슈라프 가니가 당선되었고, 이를 통해서 아프간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 권력 이양이 이뤄졌다. 그러나 다양한 국제 개발 원조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최빈국에 속하며, 탈레반과 다른 무장 세력의 반란이 지속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국가들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는 오히려 예전보다 복잡해졌다. 파키스탄의 정보기관인 ISI는 여전히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 무장 세력을 지원하고 있다. 카슈미르 지역 영토 분쟁으로 인해 파키스탄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인도는 아프가니스탄과 2011년에 전략적 동반자 협정을 맺었고, 이를 통해서 파키스탄을 견제하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의 일환으로 중앙아시아에 활발하게 인프라를 건설하고 있고, 또한 중국 서부로부터 인도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육상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파키스탄에 과다르 항구와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고 있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의 구소련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중국과 경쟁하고 있고, 시리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이란에 대공 방어용 미사일 체계를 수출하는 등 중동에서 영향력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그리고 아프간 전쟁은 이미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2001년에 태어난 청년은 이제 입대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이라크 전쟁뿐만 아니라 아프간 전쟁에 대한 피로감도 상당히 누적되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탈레반의 무장 투쟁으로 인해 추가 파병을 결정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군 철수가 불가피해 보인다.




이 모든 분쟁의 최대 피해자는 아프가니스탄의 국민이다. 40년의 내전 동안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다. 사진기자 스티브 맥커리가 1984년 12월에 파키스탄의 한 난민 캠프에서 찍은 이 사진은 아프간 내전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스티브 맥커리, "아프간 소녀" (1984)


아프가니스탄은 외부 세력의 각축장인 동시에 아시아와 중동, 중앙아시아의 문화가 뒤섞이며 화려한 문명이 출현했던 지역이다. 아프간 서부 지역의 도시 헤랏은 오랜 세월 동안 무역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6세기경에 세워진 바미얀 지역의 석불은 2001년에 탈레반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지난 40년 동안의 비극은 분명 아프가니스탄 역사의 전부가 아니다.


아프간 주민의 시선에서 2001년 이후의 아프가니스탄을 기록한 아난드 고팔의 <살아있는 자들 중에 선한 이가 없으니> (2014)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본다. 힐라라는 여인이 우여곡절 끝에 선거에서 우르주간 주의 상원 의원으로 선출된다. 수도인 카불에 있는 의회 건물에 도착한 힐라에게 한 행정직원이 묻는다.


"성이 어떻게 되시죠? 아버님을 따르시나요, 남편을 따르시나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그녀는 남편 무스킨야르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고, 이미 너무 먼 과거가 되어버린 카스 우르주간에서의 일상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했다.

'힐라 무스킨야르'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아프간의 전통에 따르면 그러했다. 과부는 남편의 이름을 따랐다. 하지만 과연 무스킨야르는 그러기를 바랐을까?

아니다. 이것은 그녀가 홀로 이룬 성취였다. 그녀는 우르주간 주민의 대표자로, 그녀의 부족인 아체크자이의 대표자로 이곳에 온 것이었다. 이는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 나라에서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밝은 미래를 되찾을 수 있다고 여전히 믿었다.

"저는 힐라 아체크자이입니다." 행정직원은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기록하고, 그녀를 비서와 보좌관들이 기다리고 있는 안락한 대기실로 안내했다.

우르주간 주의 힐라 아체크자이 상원의원이 도착한 것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방의 희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