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직 공사 중인 우리 우주기지

첫 모델하우스 사진 한 장

by 북극성

결혼하고 처음 들어온 집은
지은 지 서른 해는 된 오래된 아파트였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까진
그 사실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신혼집 샤워기에서 붉은 녹물이 쏟아지자, 샤워기 든 아내와 뒤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동시에 놀라는 장면.


하얀 수도 필터가
며칠 만에 주황색으로 물들고,
어느 날은 샤워기를 틀자
붉은 물이 세게 뿜어져 나올 때까지는.


관리실은
“오늘 물탱크 청소해서 그래요”
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그 ‘오늘’이 너무 자주 찾아왔다.


우리는 이미 계약했고,
회사와의 거리도 딱 맞았다.


“우린 성인이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녹물 나는 신혼집에서
우리 둘만의 첫 꿈을 키우고 있었다.



재계약 시점이 올 즈음엔
이 집 생활이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야식이 맛있는 편의점,
퇴근길 지름길,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마주치는 얼굴들.


그래서 또다시
같은 집과 재계약을 했다.

그런데 재계약을 마치고
한 달이 되기도 전에
채아가 찾아왔다.



샤워기에서 붉은 물이 튈 때마다
나는 같은 말을 떠올렸다.

‘여기선 아기 못 키우겠다.’



그날부터 채아가 씻고 마실 물은
항상 생수를 끓여 썼다.

그래도 욕실 배수구를 따라
붉은 물이 흘러 내려가는 걸 보면
죄책감과 후회가
함께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놀잇감도, 옷도, 이유식 재료도
최선을 다해 고르면서도
“물” 하나만큼은
끝까지 마음이 걸렸다.



채아 이모할머니는
부동산에 밝은 사람이다.


어느 날, 남편과 통화를 하다
우리 집 이야기를 듣더니
조용히 한마디를 던졌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야.
평택에 모델하우스 하나 열렸는데
가서 한 번 봐.
마음에 들면 이제 진짜 고민을 좀 해보고.”



처음엔 그 말이
조금 무모한 제안처럼 들렸다.

‘우리가 그 큰돈을 감당할 수 있을까.’



불안이 먼저 올라왔지만,
곧 이런 생각이 따라왔다.

‘어차피 계속 이렇게 살 거면
뭐라도 한 번은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기회라는 건
왔을 때 못 잡으면
나중에 후회만 남는다는 걸
이미 몇 번 겪어 본 사람이라,


결국 우리는
평택에 있는 모델하우스를
직접 보러 가 보기로 했다.




모델하우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긴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계단 구조였다.

유모차를 끌고
이 계단을 오르내리려면
꽤 힘들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때 직원들이 다가와 말했다.

“아기는 저희가 봐드릴게요.”



잠깐 떨어져 있어도 되나
망설임이 올라왔지만,

유모차와 짐을 내려놓고
두 손이 가벼워지자
조금 안심이 됐다.



채아는 직원 품에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곁에 본부장님도 함께 서서
채아를 조심스레 안고 있었다.



모델하우스의 반짝이는 주방과 드레스룸을 둘러보며 감탄하는 우리 부부. 녹물 나오던 신혼집과는 다른, 새 우주기지의 풍경이었다.


우리는 계단을 따라
위층의 집 모델로 올라갔다.

모델하우스 안은
우리가 꿈에서 많이 봤던 집을
현실로 꺼내 놓은 것 같았다.

통창으로 햇살이 흘러 들어오고,
방은 널찍했고,
드레스룸에는 옷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와… 여기다.’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상담을 받고 있는데
아까 채아를 안고 있던 본부장님이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기가 울지도 않고
참 순하고 예쁘네요.”


그러더니
손에 쥐고 있던 작은 메모지를
살짝 내밀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던 동의
12층 호수 번호가 적혀 있는 종이였다.


“본부장 권한으로 드리는 거예요.”


말투엔 약간의 생색이 섞여 있었지만
우리 마음은 그저 고마웠다.



좋은 층은 따로 빼놨다가
‘특별 손님’에게 준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오늘 그 ‘특별 손님’
우리 가족이라는 사실이
조금 우습고, 꽤 기뻤다.


옆에서 남편의 두 눈이
살짝 반짝이는 게 보였다.

꼬리는 없지만,
있었다면 분명
힘차게 흔들렸을 표정이었다.



‘채아 덕에 좋은 층까지 얻었네.
우리 집 진짜 복덩이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본부장님은 마지막으로

“첫 내 집 마련 사진 꼭 찍어 두세요.
나중에 큰 추억될 거예요.”라고 말하며

우리를 모델하우스 한가운데 세워
사진 한 장을 찍어 주었다.



잔잔한 호숫가 데크 위, 엄마가 우주헬멧 쓴 채아의 유모차를 밀고, 아빠가 웃으며 함께 걷는 세 가족의 산책 장면.



계약서를 들고 밖으로 나오자
공기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모델하우스 옆에는
넓은 호수가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 위로 물새들이 둥둥 떠 있고,
멀리서 사람들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내 귀에는
새소리와 사람 목소리가 섞여
잔잔한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가슴 한편에는 여전히

잔금… 괜찮겠지’

하는 걱정이 눌려 있었지만,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그 무게를 조금씩
벗겨내 주는 것 같았다.



“잔금 생각하니까 좀 무섭네.”

내가 작게 말하자
남편이 대답했다.


“노력해 봐야지.”


길게 위로하지 않는 사람.
대신 한 문장으로
자기 각오를 먼저 꺼내 놓는 사람.

그게 지금의 남편이었다.



노을 진 갓길에 차를 세우고, 품에서 잠든 채아와 함께 아직 공사 중인 우리 가족의 미래 집을 한참 바라보았다.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우리가 앞으로 살 아파트 단지를
한 번 둘러보기로 했다.



아직은 3층까지만 올라간
공사 중인 건물.


사람이 살지 않는
조용한 단지 안으로
노을이 비스듬히 내려앉고,

콘크리트와 철근 사이로
천천히 바람이 스며들어 왔다.



나는 아직 낮게 솟은 그 건물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 아파트, 언제 다 크려나.’



그러다 곧
다른 생각이 이어졌다.

‘뭐… 채아처럼
금방 크겠지.’



옆에서 남편이
천천히 말했다.

“나 마음먹었어.
우리 여기 들어올 거야.”



그 말에
겉으로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답해 주고 있었다.


‘당신도 이제 다 컸구나.’



문 열고 서서,알바 앱을 뒤지는 아빠 배 위에서 웃고 노는아기 채아를 가만히 바라보는 엄마.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니
우리는 여전히
녹물 나는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욕실 타일도, 좁은 거실도,
눈에 보이는 것들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침대 위에 누운 남편이 내려다보고 있는 스마트폰 화면이었다.



예전에는 늘
부동산 앱을 훑던 그 손가락이

이제는 알바 앱을
위아래로 오가고 있었다.



음대생이었던 철부지 남편.
기타만 치고 싶다며
연습실을 전전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가장이 되어
우리 셋이 들어갈 새 우주기지를 위해
밤마다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다.



몸은 침대 위에 누워 있어도
손가락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나는 그 손가락 끝에서
아직 공사 중인
우리 가족의 내일을 봤다.



지금 우리는
녹물이 나오는 오래된 우주기지에서 살고 있다.

그래도 언젠가
채아가 창 너머 저녁노을을 바라보게 될
새 집을 향해,

우리 삶의 층수도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




그날 모델하우스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우리에게 남긴 건
단순한 계약서 한 장이 아니었다.

녹물 나는 오늘에서
채아를 조금 더 안전한 내일로 옮겨 주겠다고

둘이서 조용히 서명한
약속 한 장이었다.


조수석에서 다시 보는 한 장. 오늘 우리는 집이 아니라 ‘함께 살 장면’을 샀다.



“우리 여기 들어올 거야.”

그렇게 말하던 남편의 눈빛과,

그 품 안에서
세상 다 가진 얼굴로 웃던
아기 우주인의 미소는

우리 가족의 내일을 향해
가장 먼저 올라선

작지만 단단한
첫 번째 계단처럼 느껴졌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