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사물은 캔버스에 놓이는 그 순간부터 실재하는 존재로서의 생을 가진다. 캔버스라는 공간을 통해 고흐의 해바라기는 해바라기를 벗어나고 세잔의 사과는 사과 그 이상이 되고 모네의 수련은 수련을 넘어선다. 화가의 손을 거쳐 나온 대상은 단순한 사물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유기체가 되어 캔버스를 살려낸다.
고갱과 고흐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두 점의 작품을 본다. ‘고흐의 의자는 초라하고 고갱의 의자는 화려하다.’ ‘고갱의 의자는 고흐의 마음을 대변한다.’ ‘초는 고갱의 밝은 앞날을 예견한다.’ 색감과 구도가 사물이 확연히 다른 만큼 두 그림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빛과 어둠, 초라함과 화려함, 바라봄과 외면, 남은 자와 떠난 자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들. 대척점에 있는 듯한 두 사람의 교류를 사람들은 그렇게 읽어내고 있다. 두 사람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 외의 다른 접점은 있을 수 없을까. 함께 보낸 9주가 그들에게 남긴 것은 서로가 다르다는 확신과 상처뿐이었던 것일까.
고갱의 의자와 고흐의 의자를 나란히 둬본다. <Vincent's Chair with His Pipe>는 노란빛이 감돌고 <Paul Gaugin's Armchair>에는 붉은빛과 초록빛이 감돈다. 파이프와 초, 양파 상자와 가스등 조명, 타일 바닥과 양탄자 바닥, 나무 의자와 팔걸이의자. 사물이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고 누군가 부재중이라는 것 외에 두 그림의 공통점은 없다. 그런데도 내 눈에는 이 두 그림이 하나로 겹쳐 보인다. 가만 턱을 괴고 서서 이 맞닿음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곱씹어 본다. <Vincent's Chair with His Pipe> 속 의자가 향하는 곳을 향해 선 하나를 긋는다. <Paul Gaugin's Armchair>에서 또 하나의 선을 그어본다. 두 그림 가운데 어디쯤, 점 하나가 보인다. 다른 곳을 향해 있는 두 의자의 방향이 한 지점에서 교차한다. 이 닿음이 고흐를 매료시켰으리라, 잠시나마 고갱을 아를르에 머물게 했으리라는 생각이 나를 지나간다.
주인을 찾지 못한 두 의자에서 속삭임을 듣는다.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거창한 뭔가가 아니라 소소한 일상을,
다른 누구가 아닌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었어.
그뿐이었어.
초와 책 그리고 파이프에 자리를 내주고 있는 의자에서 시선의 무게를 느낀다. 사물이 되었건, 생명체가 되었건 시선이 머무는 한, 세상 무엇도 무용해지지 않는다. 사람이 없음에도 누군가 앉아있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는 고흐의 의자와 고갱의 의자. 사람이 그 위를 차지하고 앉아야만, 어떤 지위를 가져야만 의자가 의자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물은 그리고 사람은 존재하는 것 자체로, 어떤 시선을 받는 것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부유(浮遊)함 속의 무게감 구축,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인 것은 아닐까.
너와 나,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것,
그것이 이 순간을 관통하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