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타인과의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해를 더해갈수록 연락처 목록은 더 간소해진다. 아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는, 그게 사회생활이라는 강박에 시달렸던 때, 안다고 할 수도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지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내 휴대전화 연락처 목록에 담겼다. 사람을 알아가는 게, 아는 사람을 늘여가는 게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많아진 만큼 상처 또한 더해지는 것을 경험하고부터 누군가에게 마음 주는 일에 힘을 쓰지 않게 되었다. 이생에서의 관계는 지금 내 주변의 벗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단정하게 된 것이었다.
마음을 열지 않기로 하면서 사무적인 관계가 늘었다. 무례하게 대하거나 친절하지 않은 행동을 하거나 살뜰하지 않은 게 아닌데도 빈 구석이 있다. 함께 있어 즐겁고 충만한 게 아니라 같이 할수록 소진되는 듯한 느낌. 그게 뭔지 알 수 없어 시간 속에 나와 상대를 덩그러니 세워둬 버리는 내용 없는 관계 속 대화를 찬찬히 살펴본 적이 있다.
내 귀를 겉도는 이야기 일색인 수다. 함께 한자리에 앉아있는데도 접점은 찾아볼 수 없다. 말은 하고 싶은데 대화는 거부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늘어가기만 하는 지인들. 그들과의 시간을 채우기 위해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대답하기보다는 질문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한마디를 던지면 스무 마디가 답이 되어 돌아오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대회의 주제로 올린다. 그 사이 시간은 훌쩍 흘러있다. 나는 상대의 일상을 알게 되고 상대는 나를 모르는 상태로 헤어짐을 맞고. 최근의 만남이 대부분 그랬다.
그래서였을까. 상대가 주된 화자이다 보니 내게는 무미건조한 시간이 상대에게는 의미 있게 남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듣고 질문한 것밖에 없는데 다들 속이 후련하단다. 나는 마음을 열지 못했는데 그들은 어딘지 모르게 비워진 얼굴이 되어 돌아간다. 대화 속 나를 뜯어보며 한쪽은 좋아하는데 한쪽은 무감각한, 관계의 불균형이 내게 내재해 있음을 알았다. 말하자면 요 몇 년 사이 알게 된 사람들과의 대화는 지독히 일방적인 것이었다.
작년 한 해, 말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이 나도, 나를 알고 있는 가까운 벗들도 놀라게 했다. 어느 자리에서건 듣기를 자청하는 내가 말이 많다니.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 것 같은 충격이 나를 쓸고 갔다. 곰곰이 그들과의 대화를 생각해본다. 시쳇말로 TMT로 비칠 수 있는 몇몇 장면이 나를 지나간다. 나조차 낯선 내 모습에 잠겨 무엇이 내 입을 움직이게 했을까를 곱씹는다. 말이 많아지게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방어해야 하거나 경계가 허물어지는 상황이거나. 지난 일 년 동안 내 입을 움직이게 한 것은 전자 쪽이었다. 관계 속 나를 구축하기도 전에, 나를 보여주기도 전에 누군가의 입을 통해 어떠어떠한 사람으로 규정된 것을 많이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는 변명을 늘어놓기도 싫고 그렇다고 긍정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 주었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으니, 판단은 그대들이 하라며.
현실 속 고독을 반추해낼 줄 알았던 작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 <Chop Suey>를 본다. 식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두 여자. 창을 지나온 해가 적당한 온기를 만들어내고 테이블 위에 시선을 둔 여자는 맞은편 여자의 말에 귀를 열고 있다. 늘어진 그림자와 벽에 걸린 외투와 창가의 스탠드는 숨죽인 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줄 수 있는 사람과의 대화에는 평온함이 있다. 나를 애써 꾸미지 않아도 되는 이들과의 이야기에는 따사로운 오후가 깃들어 있다. 경계의 날을 세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의 시간에는 기분 좋은 속삭임이 있다.
방어를 위한 말인가 경계를 허물기 위한 말인가.
내 입이 열린 게 마음이 닿아서 그런 것이면 좋겠다.
당신들과 말이 아닌,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그런 것이면 좋겠다.
말에 지친 당신들의 귀에 손을 덧대주고 싶어 그런 것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