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놔야 된대.
불임으로 고생하던 친구가 그랬다. 배란일, 진료, 시술, 수정, 착상. 대략 추려본 과정만 해도 다섯 손가락을 넘어서는데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 걱정과 기다림을 맡아주는 방이 있다면 거기라도 찾아가 보겠는데 세상 어디에도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이란 게 내려두자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하기로 한 이상 그쪽으로 신경이 쏠리기 마련인데 기대를 지우고 속을 비우고 있으라니. 임신을 기다리는 예비 산모에게 마음 편히 있으라는 조언만큼, 잊어버리고 있으라는 말만큼 무심한 말은 없다. 설령 그게 아기를 갖기 위해 산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해도 그 말은 섣불리 뱉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임신 여부 확진 날짜를 기다리는 게 일인 산모에게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무던해지라니. 그래야 아기가 생긴다니. 그토록 잔인한 고문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출산 경험도, 아기를 가진 적도 없는 내 상식으로는 포기하는 순간 온다는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손꼽아 기다리는 일에 어떻게 초연해질 수 있단 말인지. 일상의 모든 순간이,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마디마디가 그 일에 매몰되어 있는데 그걸 어떻게 지워야 한다는 말인지.
초연해진다는 것은 그 일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임신을 염원하는데 아기에 대한 생각은 지운다는 것은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게 말이 돼, 라며 언성을 높이던 내게 그 과정을 거쳐 엄마가 된 친구들이 말했다. 되더라고. 그 말이 맞더라고. 납득할 수 없다는 내게 친구들이 말했다. 희망이 다 타버리면 간절함도 놓게 돼버린다고.
다음 배란일을 기다리자는 말을 몇 년 동안 듣다 보면 ‘내 사주에 자식이 없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고 기간이 길어지면 ‘안 되나 보다.’하는 체념이 생기고 나중에는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이 들고 막바지에 들어서면 시술 자체가 출석체크 같은 것으로 굳혀진다는 게 그녀들의 말이었다. 불임 판정을 받지 않은 이상 병원을 드나드는 노력을 들이지 않을 수 없기에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기는 하지만 희망은 전소된 상태라고 친구들은 덧붙였다. 몇 년 전까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십여 년 동안 결과 발표만 기다리는 망부석 삶을 이어온 나였기에 더 그랬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도전과 낙방, 정체와 물러섬에 갇힌 삶이 십 년을 넘어서면서 어렴풋하게나마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세상은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길을 계속 가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 대한 내 답은 그렇다는 것이었다. 전과는 다른 방식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었다. 반드시 성과를 내고야 말겠다는 게 아니라, 말하자면 이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기에, 숨 쉬듯 꾸준히 해왔기에 앞으로도 이어간다는 마음이었다. 그랬더니 나아감도 물러섬도 없는 이 상태가 조금은 편해졌다.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행위에 대한 부담과 무게도 조금이나마 덜어졌다.
기다림에 말라가던 친구들 대부분이 ‘어미’의 이름을 얻었다. 나는 여전히 부유하고 있다. 그러면 어떤가. 지나온 날들에 후회는 없고 손은 자꾸 움직여지고 나는 날로 영글어가고 있는 것을. 다 내려놓을 거라는 선언을 할 위인도 되지 못하는 나이기에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어제와 다르지 않게, 뚜벅뚜벅 걷는다. 남들이 알아줘서 선택한 일이 아니었고 업적이 필요해 들어서고자 했던 길도 아니었으니 나만 아는 유(有)로 남긴 시간을 후회하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흘러있고 준비에 준비를 거듭해온 시간이 나로 남겨졌고 내 손에는 아직도 펜이 쥐어져 있다. 현실에 대한 지각이 들 때마다 고갱이 마지막이라며 탄생, 삶, 죽음을 그려낸 작품 <D'où venons-nous? Que sommes-nous? Où allons-nous?>을 본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작품은 볼 때마다 묘한 환상을 전해온다. 한쪽으로 흐르는 시간과 상하좌우로 향해 있는 다양한 시선과 노란 테두리와 원근의 깊이에서 느껴지는 입체감. 평면에서 입체를 느낀다. 지극히 평면적인 화가인 고갱이 이 작품을 통해 내던지고 있는 ‘관조’라는 한마디를 듣는다. 어쩌면 상황에 매몰되었기에 시간의 흐름을, 삶의 족적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걸음 물러나 나를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관조하다 보면 내가 존재했음을, 존재하고 있음을, 존재할 것임을 읽어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 작품을 통해 고갱을 널리 알려졌고 굉장한 부와 명성을 얻었다. 자살 직전 그린 그림이 그에게 새로운 생을 선사한 것이다. 놓게 되면 새로운 것을 쥐게 될까, 아니면 무(無)인 채로 남겨지게 될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놓는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를. 인생 여정 중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남겨질지. 내 삶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나는 또 어떤 눈으로 나를 그리고 내 인생을 보게 될지.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나 나를 내려다본다. 그렇게 떨어져서 나를 보는 일, 내겐 어쩌면 그것이 내려놓음일 것일지도 모른다. 고갱이 질문을 던져온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