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

by Lunar G

거울을 잘 보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친구들과 뛰어놀기에 바쁘기도 했고 홀로 상상에 젖어 보내는 시간이 많았기에 거울은 내게 그다지 의미 있는 사물이 아니었다. 그보다 나는 노트나 펜, 책, 엽서 같은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사춘기가 되면 화장을 하거나 옷을 사는데 눈을 돌리게 된다고 하던데 나는 도통 그런 데는 시선이 가지 않았다. 무관심하다 보니 외모 꾸미기에 서툴러질 수밖에 없었다. 거울 또한 자주 보지 않게 되었다.

이런 무신경함이 이젠 내 일부가 되어버렸다. 적지 않은 나이인데도 공식 석상이 아닌 곳에서는 화장도 잘하지 않는다. 옷이나 신발, 가방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외모에 책임을 져야 한다던데 나는 아직도 그쪽으로는 젬병이다. 꾸미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도치 않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될 때면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하며 꿈쩍꿈쩍 놀라는가 하면, 나를 가감 없이 고스란히 비춰내는 거울의 상에 민망해하기도 한다.

어째서 이토록 거울 보기를 싫어하는지, 거울 속 내 모습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찬찬히 나를 살펴 세 가지 이유를 찾아냈다. 첫째, 내 외모가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미에서 벗어나 있고 둘째, 나를 보고 있는 내 눈이 두렵고, 셋째, 내면을 비춰내는 거울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외모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첫 번째 이유는 감수하며 살거나 새로운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물리적 대상인 거울로는 내면을 비춰내기도 읽어내기도 불가능할 것 같으니 그와 관련해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두 번째였다. 두 번째 이유의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왜 나를, 나를 보는 내 눈을 두려워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했다. 그런 의문이 들 때마다 관객을 응시하는 자화상을 꺼내보곤 했다. 하지만 아직, 답은 구하지 못했다.


거울도 잘 보지 않으면서 거울의 속성은 자주 곱씹는다. 상을 비춰내지 못하는 벽과 나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는 거울. 둘의 차이가 뭐길래, 나를 본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상을 비춰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길래 철학가도 심리학자도 예술가도 모두 거울을 소재로 그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인지를 생각해 보곤 한다. 빛, 반사, 반영, 뒤집힘, 상, 눈, 응시, 투영. 거울을 거울일 수 있게 하는 것들은 그랬다. 시선이 있기에 거울은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망막, 나아가 내 속 어딘가에 맺히지 않는 거울 속 상은 벽과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가슴을 울리는 그림 한 점, 음악 한 곡, 책 한 권, 인간의 온기, 어쩌면 그런 것들이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버린 내면을 비춰내는 거울이 되어줄 수 있지도 않을까.


Self-portrait_The Desperate Man_Gustave Courbet_1843_45.jpg Self-portrait_The Desperate Man_Gustave Courbet_1843_45

관객을 향해 소리 없는 외침을 전하는 듯한 쿠르베의 역동적인 자화상을 본다. 사실주의의 선두주자라 불리는 쿠르베의 이 작품을 보고 있자면 낱낱이 속이 내 벗겨지는 느낌이 든다. 머리를 붙든 채 눈을 크게 뜨고 뭔가를 응시하고 있는 쿠르베. 혹자는 이 그림을 두고 쿠르베가 뭔가에 놀란 것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고 해석한다. 나는 이 그림에서 쿠르베가 수억만 번도 더 마주했을 그 자신의 눈을 본다. 이 작품은 두려움, 절망, 분노, 당황, 혼란. 맨눈으로 자신의 감정을, 유약함을 마주해본 그였기에 남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서툴고 부족하고 나약한 내 모습을 들키기 싫어 내 눈을 보는 것조차 꺼리는 내게 쿠르베가 말한다.


그대 자신을 응시하라.
있는 그대로의 그대를 받아들이고 앞날을 위해 정진하라.


거울 앞에 선다. 나를 응시하고 있는 나를 향해 말한다.

눈을 피하지 않으리라.
나를 채근하는 내 눈을 마주하리라.
내 눈을 바라보는 것, 거기서부터 내 역사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keyword
이전 12화도끼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