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ple
운 독파 법을 고민한다. 가만 앉아 기회를 받는 듯한 사람들을 넘어다 본다. 실은 노력했을테지. 죽을 만큼. 결과와 실적을 내고서도 고개를 숙이는 자들의 여유. 그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아득바득하고 하나도 건지지 못한 일이 부지기수였고, 이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목숨을 다해 노력하는데도 아니라는 답을 받은 적이 수없이 많았으며, 가만있어서는 무엇 하나 주어진 적이 없었기에. 노력을 뒤로 물리는 말이 겸손이라기보다는 가진 자의 거드름 같이 들릴 때가 있다. 속이 좁은 거겠지. 그들이 말하는 운이 내게는 없는 것 같아 서운한 거겠지. 용렬한 거겠지.
나도 겸손한 사람이 좋다. 나 역시 나를 뒤로 물리는 삶을 살아오기도 했고. 두루두루 주변과 잘 어울리며 날을 세우지 않는 사람은 접근 벽이 높지 않다는 장점이 있으니까. 사실 적당한 거리에서 말 그대로 '지인'이라는 관계를 맺기에는 그만큼 편한 사람도 없다.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지 않고 하늘이 도왔던 것이라며 손사래를 치는 게 적당히 교류를 하기에는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 보면 불편하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의 친분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딱 그 정도의 거리가 생겨버리고 만다.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거리. 그것은 지인의 거리다. 그러한 거리를 가지려는 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 친구 사이에는 겸손의 말이, 겸양의 말이 필요 없다. 공치사가 없어도 친구는 나를 알아줄 것이기에. 기쁜 일에 가감 없이 기뻐하는 나를 오해하지 않을 것이기에. 나의 어떤 성취가 너를 해하는 독이 아닌 너를 성장시킬 동력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믿기에. 성취를 겸손으로 포장하는 것은 어쩌면 그 정도의 거리를 설정하는 것이고 그 정도의 관계밖에 안 됨을 선언하는 것일지도.
죽을 만큼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다. 이것을 가지고 싶어서 이것을 탐냈고 그것을 손에 쥐기 위해 하루하루 시간을 쌓아왔다고. 그 말이 듣고 싶은데. 겸손이 미덕이 된 이 나라에서는 자신의 노력을 드러내는 게 이상해 보이는 구조가 있나 보다. 아니면 친구를 친구로 두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이 있거나. 겸양의 말이 양 날개가 다 꺾일 정도로 노력하고도 하나 조차 손에 쥐지 못한 자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고 친구였던 자를 지인으로 만들어 버리니, 겸손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운이 실력으로 치부되는 경우를 많이 봐 와서 그게 늘 스트레스였다. 스스로도 돕고 하늘도 돕는 자들의 좋은 때를 넘어설 수 없었던 적이 적지 않았고 그리하여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운을 타고난 이들은 앞서 내 앞에 놓인 뭔가를 채가곤 했었으니까. 노련하고 유연하게 말이다. 그러면 나는 또 내 노력이 부족했구나 하며 나를 채찍질했다. 누군가의 겸손에나 쓰이는 운이 내게는 채찍이었고 미덕이라는 그 겸손이 나에게는 아프고 아린 매였다.
아득바득 사는 이들의 삶을 허탈하게 만들고 그들의 자리를 빼앗아가고 선택을 강요하고. 운은 때로는 참 가혹했다. 수포가 된 노력 앞에 엉엉 퍼질러 우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말했다. 운 좋은 사람을 어떻게 이기냐고. 억울해하지 말라고. 그래 봐야 나만 서운하다고. 어째 그게 억울하고 서러웠다.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닌데. 나는 나로 서고 싶어 버티고 있는 건데. 위로라고 하는 그 말이 세상으로부터 내쳐지는 것 같았다. 세상이 나에게만 가혹한 것 같고 네 그릇은 여기까지라고 하는 것 같았다.
운이 없는 것인지 운이 커서 그런 것인지. 하는 일마다 미끄러지고 두드려 맞던 시기를 지나오며 정리한 운 독파 법을 남겨본다. 운이 늘 좋으면 좋으련만 그렇지만은 않았다. 운에는 드나듦이 있었다. 노력 없는 운은 결국에는 운 조차 되지 못했다. 그래서 운을 운으로 두기로 했다. 너는 너의 운용 방식을 따르게 두고 나는 나의 방식대로 내 생을 끌어간다는 착각 속에 지금까지 처럼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운과 나의 지향이 같고 합치점이 많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상관없다. 나는 내 인생을 운 따위에 위탁할 만큼 약하지 않기에. 운은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기에. 나는 겸손하고 싶어도 겸손할 수 없기에. 용렬한 이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나를 아직은 믿고 나가고 싶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