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고릴라 가면을 쓴 남학생들이 차례대로 방으로 들어간다. 한참 후에야 방에서 나오는 학생들은 하나 같이 들떠있다. 관객은 벽 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공주는 고릴라 가면 속 얼굴을 보지 못한다.
불편하고 섬뜩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 거란 짐작이 관객의 가슴을 틀어막는다.
공주가 잠든 사이 순결이 뭔지도 모르는 소녀의 첫 밤이 사라졌다. 공주의 삶을 유린하고 나오며 고릴라들은 자랑스레 웃고 있다. 폭력을 당당해하며 담배를 피워 물고 술을 마신다. 그 이후 일어난 일은 한 소녀의 순결을 뺏어간 그 일보다 더 끔찍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공주의 얼굴과 담배 연기 자욱한 집과 공주 앞에서 당당하던 가해자들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넋 나간 사람처럼 걷다가 낯선 곳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우두둑 쏟아졌다. 살아있는 게 왜 이렇게 비참한 일이 되어야 하는지, 가슴이 미어졌다. 해가 질 때까지 울어도 속은 진정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사는 게 서러워졌다. 인간의 폭력과 잔인함, 인간이 빚어낸 비극을 부둥켜안은 채 나는 절망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
사색에 잠겨 드는 내가 지독히 싫어 끊임없이 그 말을 되풀이했다.
검은 바다와 아우성과 노란 리본과 촛불. 매일 같이 이어지는 절망적인 소식에 방향도 대상도 모르고 분노하고 절규하고, 울분을 토하고 있던 때였다. 살아있는 게 왜 이렇게 죄스러운 일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내내 땅만 보고 걸어야 했던 그때, 왜 하필 그 영화를 보게 됐는진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정체 모를 고릴라의 환영 속에서 울고 또 울며 삶이 왜 이래야 하는지, 내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대체 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곱씹었다. 답은 구할 수 없다.
2015년 5월.
글 하나를 적고 호되게 매질을 당했다.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냐는 말을 들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모두들 질식한 듯 살았으니 언성을 높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게 내 아이에게 일어난 일이었더라도 과연 그렇게 무심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울분이 치밀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게 특권은 아닌데, 내 가족이 무사한 게 당연한 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누군가의 상실 앞에 왜 그토록 기세 등등하게 목소리를 높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숨 쉬고 있는 건 승자의 훈장이 아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울기만 했던 우리는 그날 일에 대한 책임을 함께 나눠 가져야 한다. 수가 오가는 정치적인 일은 잘 모르겠다. 도의적인 측면에서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친구로서 우리에겐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누군가의 아픔을 나눠 짊어져야 할 책임이 있다.
소중한 이를 잃은 이들께 누가 되진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차마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밤, 나는 또 나 살자고 이러고 글을 쓴다. 이렇게 손 움직이는 것 밖에 할 수 없다는 게 더없이 미안하고 죄스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