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간, 같은 공간, 그리고 다른 시각. 그 첫번째 이야기(1/2)
광화문(光化門): 임금의 큰 덕이 큰 나라를 비춘다.
덕수궁 옆 서울 시청을 지나 세종대로를 따라 걸어가면,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기다리는 그 곳. 조선을 지나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를 함께 했던 자리. 많은 사람들이 서로 껴안으며 웃고, 울고, 외쳤던 자리.
광화문 거리를 설명하는 수식어는 참 많다. 필자에게 있어 광화문 광장은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장소였다. 약 20여 년 전 이곳에서 2년 2개월의 군생활을 보냈다. 이곳에서 미선이와 효순이를 추모하는 사람들을 만났고(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이때가 범국민적 촛불집회의 시작일 것이다), 자신의 일터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온 사람들을 만났으며, 월드컵 4강이 확정 된 후 거리로 뛰쳐나온 붉은 악마들을 만났다. 그리고 2003, 2004년 새해를 알리는 보신각 타종을 보러 온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래서 힘들었고, 매번의 이벤트가 내게는 군생활을 꼬이게 만들었다. 오죽했으면, 전역하면 이 방향으로 오줌도 안 싸겠다고 굳게 맹세까지 했을까. 그런데 그 때부터 궁금했다. 도대체 이곳은 어떤 장소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매번 모이는 걸까?
서울 촌놈이었던 내게 있어 광화문 일대는 모든 것이 새롭고 경이로웠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명 서울 안에서도 특별함이 있음에 틀림없다. 광화문 하면 떠오르는 노래로 옛날 사람과 요즘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겠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1988)가 떠오르면 옛날 사람, 그리고 규현의 ‘광화문에서’(2014)가 떠오르면 요즘 사람. 물론 규현의 노래도 2014년에 나왔으니 지금은 옛날 노래일지도 모르겠다.
시간 차이는 있지만 두 노래 모두 광화문 거리에서 옛 기억을 떠올리는 청승맞은 노래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왜 하필 광화문이 ‘괜히 바보처럼 이 자리에 서 있고(규현의 광화문에서), ’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오는(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는 그런 곳이 되었을까?
실제로 덕수궁, 시청, 광화문을 지나 청계천 거리를 걷다보면, 두 노래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그다지 청승맞지도 그렇다고 한없이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장소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필자도 그랬다. 20살 이후 그저 이유없이 혼자 걷고 싶을 때 이곳을 습관처럼 찾아 왔으니까. 20대 때 의미없는 인간관계에 진절머리가 날 때 광화문을 찾았고, 그저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즉흥적으로 광화문을 향했다.
그렇게 광화문 일대는 뭔가 고즈넉하고 요즘 말로 탑골공원에서 느껴지는 세기말 분위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익선동을 방문한 후 그 생각은 바뀌었다. 한옥 카페 거리를 과감하게(?) 크롭티를 입은 채 걷고, 먹고, 즐기는 20대 친구들을 보면서 이 공간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 것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종묘가 있는 탑골공원은 20대 들에게 레트로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소개까지 되어 있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재개발이 시작된 피맛골 거리가 있고, made in china 관광상품이 여전한 인사동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성조기를 흔들고 있는 사람들이 덕수궁 앞에 모여 있다. 그런데, 광화문 일대가 조금씩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이건 내 착각인가? 한번 떠나 보자. 그리고 동일한 장소를 현재 20대는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하는지 알아보자.
아침을 비추다.
600년 수도 서울은 많은 역사가 혼재된 곳이다.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지난 100년간 서울의 모습은 계속 바뀌었지만 여기 정동길은 그 모습 그대로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끄럽게 말을 걸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누군가를 지독히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라도 다독여 준다.
아침 햇살이 비추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은 대형 미술관들과 다르게 콧대가 높지 않다. 캔버스 위에 그려진 그림과 그 작가를 이해해야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고 떠들지 않는다. 작은 숲길 뒤 언덕 위에 수줍게 숨어 있다. 그림은 몰라도 좋으니 그냥 여기서 쉬고 가라고 손짓한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더 큰 첨벙(The Bigger Splash, 1967)도 이곳에서는 조용한 청량감 정도로만 느껴지는 곳이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애환
종로하면 피맛골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특히 30-40대들은 피맛골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물론 피맛골을 용케 가본 사람은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피맛골의 본래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피맛골(避馬골)은 문자 그대로 ‘말을 피하는 골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말을 피하는 골목이라니?
옛날 조선시대 사람들은 말타고 다니면서 ‘교통사고’를 자주 일으켰단 말인가?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서민들이 생선구이에 막걸리 한 잔 편하게 할 수 있는 골목이 피맛골인데,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말을 피하는 골목이 피맛골이었단 말인가?
조선 시대 종로는 궁궐, 관가와 가까워서 가마나 말을 탄 고관대작의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종로 일대에 사는 서민들은 고관대작을 만나면 길가에 바로 엎드려 예를 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길가에 엎드리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학교에서도 캠퍼스 내에서 교수를 만나면 인사를 할까 아니면 살짝 벽 뒤에 있다가 교수가 지나가면 그 때 가던 길을 갈까 고민하는 학생과 같은 마음이 아닐까? 필자 역시 대학생때 그런 고민을 몇 번 했었으니까...
그래서 서민들이 이런 번거러운 일도 덜 하고 아예 안 보는게 속이 편했기에 종로 큰 길 뒤편 골목을 이용해 왕래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형성된 골목이 피맛골이란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 왜 주머니가 가벼운 서민들이 하필이면 이렇게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생선구이나 고추장 불고기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그렇게 마셨는지.
2002년 군시절 첫 휴가를 받고 동기 그리고 선임, 후임들이랑 같이 갔던 곳이 피맛골이었다. 본래 근무지이기도 해서 종로 일대는 훤히 알고 있었지만 휴가를 받아 즐기는 피맛골은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때도 그랬다. 동기랑은 너 때문에 내 군생활이 꼬였다로 시작했고, 후임들이랑은 너희들이 잘해야 내가 편하다고 갈궜고(?), 선임들한테는 그저 잘 보이려고 했던 기억. 결국 동기, 후임, 선임 가진 돈은 없었기에 각자 가진 돈 각출해서 소주를 몇 나발 불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2003년 서울시에서는 피맛골에 대한 재개발 허가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과거의 흔적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서민들의 애환이 오랫동안 담겨져 있던 그 작은 골목을 없애고 새롭게 개발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가 피맛골을 예외로 두지 않았으니 지금은 예전의 피맛골이 완전히 사라진지 오래다.
2020년 초가을 피맛골 입구가 그랬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피맛골에 들어서는게 여의치 않을 정도로 음산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네 서민들이 그나마 세상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았던 그 곳. 푸념을 늘어놓는 동료들끼리 서로 니가 잘났냐 내가 잘났다 하며 다투기도 했던 그 모습들이 이제는 자취를 완전히 감춘 것이다.
피맛골 입구에는 재개발 전에 매장문화재 발굴조사를 하고 있었다. 혹시 모를 문화재가 피맛골에서 발견될 수 있으니 문화재 보호를 위한 조치라 할 수 있다. 시간의 경계를 넘어 과거 우리네 조상들이 만들었던 문화재가 발굴되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피맛골에서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푸념을 늘어놓던 우리네 모습들은 이제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어르신들의 핫플 – 락희거리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을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사람은 타이타닉을 재난영화로 보기도 하지만 어렸을 때 내가 봤던 타이타닉은 분명 로맨스였다. 많은 사람들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릿의 뱃머리 키스신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개봉 당시 미성년자였던 필자는 두 주인공이 남들 모르게 자동차 안에서 사랑을 나누었던 모습이 더욱 기억에 남는다. 그 장면을 보면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넘어 터진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으니까.
타이타닉의 포스터는 너무 유명하니까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그런데 관점의 차이인가? 아니면 포스터를 그린 사람이 그냥 성의가 없었던 걸까? 그마저도 아니면 상영관 홍보팀과 포스터 제작업체 간에 갈등이 있었던 걸까?(실제로 비즈니스를 하면 머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비즈니스가 진행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내가 아는 타이타닉 포스터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재상영한다고 포스팅을 한 영화관을 발견했다.
누가 봐도 저 남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아니고 누가 봐도 저 여자는 케이트 윈슬릿이 아니다! 하지만 그 아래 남자는 송해 선생님이 분명하다! 아니. 이건 도대체 누구의 장난이란 말인가. 송해 선생님은 한번에 알아 보겠지만, 타이타닉은 한글로 쓰여 있어서 타이타닉이라 이해한 것일 뿐 타이타닉이 타이타닉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다시한번 눈을 돌려 보았다. 그래. 여기는 락희거리 아닌가. 대가리만 커지고 예의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으며, 우리 덕에 지들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젊은 놈들로부터 인정도 못 받는 그 분들. 하지만 우리끼리는 ‘라떼는 말이야’라고 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며, 사이다택(사진 아래를 자세히 보시라!)에서 몸을 흔드시는 그 분들의 핫플이 바로 이곳이다.
클럽에서 레드불과 예거 마이스터를 혼합한 예거밤을 마시며(물론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대학생에게는 이것 또한 사치다. 그냥 클럽 들어가기 전에 깡소주 들이키고, 프리 드링킷 티켓으로 버티는게 능사지), 춤을 추는 20대 청춘들 못 지 않게, 순대국에 막걸리를 마시고 사이다택에서 흥겹게 몸을 흔드시는 어르신들이 즐기는 곳이 바로 락희거리다. 물론 더 이상의 음주는 건강에 해롭기 때문에 사이다택에서 즐기시는 그 분들의 애환을 모르는건 아니다.
어르신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타이타닉 오리지널 포스터는 그리 큰 흥미를 끌기 어려울 수 있겠다. 매우 긴 러닝타임(194분)을 고려했을 때, 어르신들이 타이타닉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그저 상영관에 앉아 편하게 영상보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저 정도 포스터는 괜찮겠다 싶다. 그리고 그 어르신들은 어차피 영화 포스터를 보고 영화를 볼까 말까 결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락희거리는 최근 핫한 익선동 카페골목과 맞닿아 있다. 같은 공간에서 만나는 어르신들과 20대 청춘들이 보내는 시간의 속도는 분명 다를 것이다. 같은 시공간이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시간의 속도 역시 더욱 빨라진다. 하지만 하루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는 시간의 속도는 역전이 된다. 어르신들한테는 하루라는 시간은 그저 더디고 느려터진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실버공연장은 더디고 느려터진 시간을 그래도 별 생각없이 재밌게 보낼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고관대작들이 타고 다니던 가마와 말을 피하기 위해 모였던 피맛골이 없어졌으니 이제 어디에 모여서 가볍게 한 잔할까? 젊은이들은 미래를 이야기하고 어르신들은 과거를 회상한다. 누군가한테 인정받기를 원하는 건 아닐 것이다. 어차피 지난 시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세대다. 더디게 지나는 하루지만 뒤돌아보면 정말 빠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누구 눈치 안 보고 ‘라떼 is horse’를 외칠 수 있는 그런 공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 모습이 미래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니까.
과거의 공간과 지금의 시간이 만나는 곳 – 익선동 빈티지
락희거리 바로 50m만 걸어가 보자. 요즘 말로 ‘노는 물이 다르다.’ 여기저기 곰팡이가 피어 있을 것 같은 여관을 리모델링한 루프탑 바가 있으며, 한옥을 개조한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20대 청춘들이 있다. 리모델링에는 관심이 없는 주인장은 20년도 더 되어 보이는 가게를 그대로 둔 채 통돼지를 굽고 있고, 대낮부터 한 쌍의 연인은 통삼겹에 소주 한잔 걸치고 있다. 시카고 수제 맥주로 알려져 있는 구스 아일랜드(Goose Island)는 아예 펍으로 들어 앉아 여기서부터 시카고까지 10,483.42km라고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공간과 시간이 교차하는 골목길이다. 이 골목길을 탐험하듯 다니는 20대 청춘들은 아마 이런 골목길이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그 흔한 이정표 없이 머릿 속 네비게이션을 따라 좁은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다 막힌 길을 마주하면 다시 뒤돌아 가기 일쑤인 곳. 골목길이 놓여 있는 공간은 그대로지만 오고가는 사람은 더욱 많아져, 공간의 재해석이 이루어지는 익석동이다.
불친절한 보행길이지만 그 좁은 골목을 다닥다닥 붙어 다니며, 과거의 공간과 지금의 시간이 교차하는 익선동에 20대 청춘들은 어떤 경험을 하고 있을까? 서울 어디를 가도 비슷한 카페, 보세 옷 가게, 펍 등이 있는데,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재밌기 때문이다.
지면에 닿아 사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떠서 생활하는 아파트는 단순 주거 공간을 넘어 나의 자산을 불릴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 그래서 내 자산을 불리기 위해서는 새롭게 개발을 해야 하고 또 오래된 것들은 재개발을 해야 한다. 전에 없던 새로운 건물, 골목, 그리고 상권이 형성되어야 향후 10년 길게는 30년을 돈 걱정없이 살 수 있는 것이다.
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청춘들은 한국의 경제 부흥 마지막에 태어난 세대들이다. 좁디 좁은 골목길은 ‘응답하라 1988’를 통해서만 접했을 것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봤던 그 배경을 몸으로 잠시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서울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20대 들에게는 익선동이 재밌는 곳이다. 물론 그들은 미각마저 과거와 타협할 수 없기에 통삼겹살 집 보다는 티라미슈 카페에 더 많이 몰리는 것이다.
학계의 여러 전문가들은 언론을 통해 세대 간의 갈등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TV만 틀면 정치 뉴스가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진보니 보수니, 여당이니 야당이니, 촛불이니 태극기니 세대 간 갈등을 조장하는 뉴스들이 나오니 시청자들은 세대 간의 갈등이 매우 심각하구나라고 학습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르신들은 젊은 세대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고착화되고 젊은 세대들은 어르신들을 보면서 바라보는 관점 역시 고착화되는 것이다. 물론 나같은 중년들은 어디에 끼어야 인정받을까 고민하겠지만.
미래를 밝히다.
유독 점집이 많이 보인다. 점집이라고 하면 조금은 촌스러우니 타로라고 한다. 여기 종로의 기운이 워낙 좋은 걸까? 남녀노소 구분없이 점 혹은 타로에 대한 인기는 여전한 듯하다. 이제는 말만 하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스마트 어시스턴트(smart assistant)가 있는 시대에 점집(타로)이 웬말인가? “언제쯤 취업할 수 있을까요?” “궁합 좀...” “회사 이직을 할까요?” “땅을 좀 사고 싶은데, 거기 기운이 어떤지...” “그냥 요즘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점집에 사람들이 방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이 있다. 고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른다. 더더욱 중요한건 미래를 모른다. 그렇다. 우리 인간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게 과학적이던 그렇지 않던 점지해주는 신에게 조금이라도 의지하고 싶고, 나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신에게 더 의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다시 지금
빅데이터, 4차 산업혁명, 블록체인, 그리고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과 같이 지금을 설명하는 단어들은 참 많다. 그리고 그러한 단어들을 알고 있어야 하며, 또 아는 척 좀 해야 인정받는 것 같다. 시스템이 중시되어야 하고, 효율적인 자원관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복잡성이 높아진 현대 사회에 ‘인간성’을 논의한다는 것은 사치로 간주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는 이러한 논리들이 적용되어야 도시 생태계가 돌아간다고 믿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계천에서 100원, 500원짜리 동전을 던지며 앞으로의 시간을 기대하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은 흐르고 있으며, 흐르는 시간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다. 누구에게나 흐르는 시간은 같지만, 시간의 주관적 흐름을 늦출 수 있는 공간이 광화문 거리다.
임금의 큰 덕이 큰 나라를 비춘다. 광화문(光化門)을 등지고 앉아 있는 세종대왕은 이순신 장군의 호위 하에 서울울 그리고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있다. 그 앞에는 미래의 유산인 지식과 지혜(智慧)의 창고(교보문고, 세종문화회관)가 있으며, 대중들의 올바른 눈이자 귀가 되어야 할 소리통(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이 있다. 개인의 미래도 예측하기 어려운데, 한 나라의 미래를 어떻게 예측할까? 광화문 광장에서 2020년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세종대왕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