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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Feb 21. 2020

한강의 뒷물결아 앞 물결을 밀어내다오

장강이 정치에 가르쳐주는 것들

“장강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长江后浪推前浪)”


한국 정치에서 세대교체론이 등장할 때마다 인용되는 중국 격언입니다. 장강과 관련된 시구(詩句)나 비유는 유난히 정치 분야에서 많이 등장합니다. ‘검찰개혁은 버티거나 거스를 수 없는 장강의 물결’.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칼럼에도 장강이 나옵니다. ‘장강의 물결 앞에 선 경제 3주체’. 변화에 맞춰 선제적 산업구조 조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글에도 장강이 빠지지 않습니다.


중국의 ‘장강’은 이렇게 이웃집 ‘한강의 나라’ 말과 글에 수시로 출현하는 단골손님입니다. ‘거대한 흐름 속에서 무엇도 영원히 머물 수 없다’는 진리를 이보다 잘 표현한 문장은 없기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클리셰’를 인용하는 것이겠지요. 굳이 거창한 문장이 아니더라도 장강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장강(长江)은 중국을 가로지르는 가장 긴 강입니다. 총 길이  6,380킬로미터로 세계에서 세 번째, 아시아에서는 첫 번째로 긴 강이죠. 서쪽 티베트 탕구라산에서 발원해 중국 11개 성시를 통과하는 대장정을 거쳐 동쪽 상하이 인근 바다로 빠져나갈 때까지, 수많은 물줄기가 합류하며 거대한 강을 이룹니다. 하해불택세류(河海不择细流), 강과 바다는 개울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고사성어를 몸소 보여주고 있지요. 영화 <남산의 부장들> 속 명대사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와 일맥상통한다고 할까요.

    

장강은 양쯔강(扬子江, 양자강)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양쯔강은 본래 장강 하류를 칭하는 이름이었는데, 처음 서구에 잘 못 알려지면서 지금처럼 굳어졌죠. 사실 장강의 이름은 양쯔강뿐만이 아닙니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통천하’도 장강 최상류 지역 이름입니다. 퉈퉈허(沱沱河, 타타하)와 당취(当曲, 당곡)의 합류 지점에서 위수(玉树, 옥수)까지 칭짱(青藏) 고원 위를 흐르는 813㎞ 구간을 말합니다. 윈난성 지역에서는 진사장(金沙江, 금사강)으로 불립니다. 이빈(宜宾, 의빈)에서 이창(宜昌, 의창) 사이 쓰촨 분지를 구불구불 흐르는 구간은 촨강(川江, 천강), 후베이성 즈청(湖北枝城, 호북 지성)에서 후난성 청링지(湖南城陵矶, 호남 성릉기)까지 옛 형주 지역을 지나는 구간은 징장(荆江, 형강)으로 불리죠. 그 이후로도 구간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른데요. 한국의 정당 이름 변천사만큼이나 복잡합니다. 장강이든 한국의 정당이든 이름을 바꾼다고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라는 점도 똑같죠.


색깔은 달라도 모두 장강


장강은 어느 지역에서 보느냐에 따라 색깔도 다릅니다. 장강제일만에서는 회색빛으로 보이지만, 쓰촨 성으로 향하는 석회암 지대를 지나면서는 영롱한 옥색을 띱니다. 중국 최대 담수호 포양호를 만나는 지점에선 황토색이 되기도 하지요. 뒷물결이 반드시 앞 물결보다 맑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쨌든 거대한 물줄기는 도도히 흘러서, 세계 최대 규모의 삼협댐을 지나 마침내 바다에 당도합니다.


“강은 반드시 똑바로 흐르지는 않으며, 굽이치고 좌우 물길을 바꿔가는 게 세상 이치지만, 그러나 어떤 강도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 퇴임 고별 만찬 중


장강제일만


진사장 줄기 따라 장강제일만과 후탸오샤


윈난성 리장 외곽의 스구전(石鼓镇, 석고진)은 장강 상류 진사장이 처음으로 꺾어지는 ‘장강제일만(长江第一湾)’으로 유명합니다. 장강제일만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도 중국을 대표하는 풍경으로 등장했는데요. 스구전의 일만반점(一弯饭店) 뒷산에 올라가면 그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산길을 오르면 앞이 트인 전망대가 나오는데요. 풍경의 규모가 커서 초광각 카메라가 아니면 한 번에 담기조차 여렵습니다. 4~5시간 수풀을 헤치고 올라가야 비로소 그 위용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진사장의 거대한 물줄기가 100여도로 급회전하며 동북쪽으로 다시 올라가는 모습은 압권입니다. 뒷물결이 앞 물결을 흘러가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밀어 올려 완전히 방향을 바꿔버리는 것이죠. 한국 정치가 장강에서 배워야 할 것은 단순 세대교체가 아니라 시대정신과 정책방향의 파격적 전환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장강제일만에서 꺾어진 진사장의 물길은 위룽쉐산(玉龙雪山, 옥룡설산)과 하바쉐산(哈巴雪山, 합파설산) 사이 협곡으로 이어져 ‘후탸오샤(虎跳峡, 호도협)’라는 장관을 연출합니다. 이 구간과 관련해 지역 청년이 들려준 전설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진사장은 당찬 아가씨였대. 어느 날 자신을 무슨 설산에 시집을 보내려 한다는 얘길 들었지. 그녀는 싫다고 했어. 그래도 억지로 결혼을 시키려 하니까, 반항하며 완전히 방향을 틀어서 달아나 버렸대. 그래서 장강제일만이 생긴 거지. 보통 큰 강이 북쪽으로 다시 올라가는 법이 잘 없는데, 정말 당찬 아가씨였던 거야.”

전래동화 같은데 묘하게 페미니즘적입니다.


“위룽쉐산과 하바쉐산은 머리가 하나인 형제였는데, 매일같이 싸워서 세상이 너무 시끄러웠대.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인간에게 돌아갔지. 사람들의 원성이 커지자 신의 귀에도 들어갔대. 신은 하나였던 형제를 위룽과 하바로 나눠버렸고, 둘 사이를 잘 조정하도록 여동생 진사장을 중간에 흐르게 했대. 그렇게 후탸오샤가 생기게 된 거지.”

전에 들었던 나시족 전설과는 많이 다른데요. 어쨌든 ‘갈등을 잠재우는 여성 리더십’을 보여주는 전설이네요.


노혜경 시인은 <요즘 시대에 페미도 아니면 뭐해?>라고 했는데, 이 전설을 들어보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도 재능 충만 페미 스토리텔러가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후탸오샤


한강의 뒷물결아 앞 물결을 밀어내다오


이제는 초야에 묻힌 386 선배가 물었습니다.

“너희는 우리를 왜 그렇게 미워하냐?”

지난 몇 개월 사이 출간된 후배들의 책 속에 한결같이 386 비판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제목부터 대놓고 386 비판서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고전 강독 에세이인데, 날카로운 386 비판이 한 챕터나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죠. 주제와 다른 내용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며 출판사 사장까지 나서 분량을 대거 드러낸 것이 그 정도라 합니다. 뜨거운 분노에 손을 델까, 선배는 당사자가 아닌 제게 그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저는 말하는 대로 살고 싶고, 사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386의 위선이 싫었어요.”

선배는 조금 편해진 표정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권력 잡은 소수의 386 정치인 말하는 거지?”

질문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금배지도 한 번 안 달아보고 도매금으로 비판받는 건 억울하다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셨던 것인지도요.


얼마 전 한참 어린 후배가 몇 년 만에 카톡을 보내왔습니다. “한 번 만나고 싶어요.” 한 밤중에 도착한 문자는 SOS 신호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장 약속을 잡았지요. 누구보다 활기차게 학업과 시민사회 활동을 해오던 친구였는데, 못 본 사이 얼굴이 어두워졌습니다. 사는 게 예전 같지 않다고 풀이 죽었습니다. 정책 공부도 함께 하고 조언도 해주시던 선생님들이 정권 바뀐 후 다들 공직으로 바빠져서, 이제는 마땅히 상담할 어른도 없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밖에 있을 땐 의욕적으로 비판적 대안을 말씀하셨는데, 막상 지금은 기대만큼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도 했습니다.


“앞으로 뭘 해야 할까요?”

힘없이 묻는 그 친구에게 할 말이 없었습니다. 짧은 생각을 전하고 헤어졌지요.

“앞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말아요. 이제는 본인 세대의 문제의식으로 당신들 생각을 말하면 좋겠어요. 80년대 문제의식으로 지금과 같은 정치를 하는 분들은 이미 있잖아요. 이 결과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문제의식을 가진 세대만이 대안을 생각해낼 수 있지 않을까요.”

늦은 밤까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낙담한 그 표정이 잊히지가 않았습니다. 이런 사회를 만든 어른으로서 너무나 미안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저는 그저 서늘하게 이 전환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분노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미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어떤 세계관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 시대가 끝난 것뿐입니다. 이제 장엄한 레퀴엠과 함께 다음 막으로 넘어갈 차례입니다. 저는 앞 물결에 휩쓸려 함께 떠내려간다 해도 기꺼이 뒷물결의 도래를 환영할 참입니다.


청년들이여 금간판이나 내걸고 있는 지도자를 찾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차라리 벗을 찾아 단결하여 이것이 바로 생존의 길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나으리라. 그대들에게는 넘치는 활력이 있다.
밀림을 만나면 밀림을 개척하고, 광야를 만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을 만나면 사막에 우물을 파라.
이미 가시덤불로 막혀 있는 낡은 길을 찾아 무엇할 것이며, 너절한 스승을 찾아 무엇할 것인가!

- 루쉰, <청년과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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