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 저격 초간단 동식물 그리기
코로나19로 일상이 멈춘 2020년 봄, 조카 은유는 일곱 살 인생 중 최고의 시련기를 보내고 있다. 유치원 졸업 발표회가 취소되었다. 외우고 또 외우며 준비했던 영어 뮤지컬 대사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부모조차 참석 금지된 졸업식은 친구들과의 알콩달콩한 시간도 없이 황급히 끝났다. 무표정한 얼굴로 꽃다발을 든 기념사진이 메신저로 언니에게 전송되었다. 뮤지컬 대사를 멋지게 완수해내며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던 은유는 아쉬움에 눈물을 터트렸다. 코로나19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조카의 유치원 졸업식을 빼앗아갔다.
초등학교 입학식도 무기한 연기됐다. 기약 없는 집콕 생활이 시작되었다. 두 아이의 삼시 세 끼와 간식, 육아와 교육을 모두 홀로 감당하게 된 언니는 매일이 전쟁이었다.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낼까, 그것이 언니의 숙제였다. 언니는 공교육 공백기에 균형 잡힌 놀이와 교육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정표를 짰다. 기상시간부터 EBS 교육방송 시청, 학습지 풀이, 받아쓰기, 피아노 연습, 그림 놀이, 심지어 청소기 돌리기까지 일정에 넣어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아직 글을 못 깨우친 둘째 은서의 시간표에는 사진까지 붙여 알아보기 쉽게 엑셀 표를 만들었다. 게으른 나였다면 당장 그냥 학교에 가겠다고 도망쳤을 법한 스파르타식 일정이었다.
어떻게 하면 두 조카가 즐겁게 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언니의 독박 유아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오늘 뭐 하지? 아트놀이' 프로그램부터 구글 증강현실(AR)로 3D 동물 보기까지, 인터넷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아이디어는 바로바로 언니에게 전달됐다. 이강훈 작가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는 눈이 번쩍 뜨였다. 지난해 일러스트 작업을 했다는 어린이 책 얘기였다. 코로나 사태 이후 인터넷 서점 판매가 급증한 것 같다는 것이다. '미래가 온다, 바이러스', 초등학생도 이해하기 쉽게 쓴 바이러스 해설서란다. 바로 주문해 은유에게 보냈다.
도착하자마자 혼자 낄낄거리며 책을 본다는 언니의 제보. 일주일 후에는 예상치 못한 인증숏이 도착했다. 그림책에 영감을 받아 은유가 만들었다는 조형물이다. 무지개 나라 연방 보라 왕국의 보라 공주가 코로나에 걸린 아빠를 치료하기 위해 약초를 찾아 떠나는 모험을 표현했단다. 자세히 보면 코로나19 모양은 물론 보내준 책에 나오는 바이러스가 총출동했다는 언니의 전언이다.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언니가 준비한 어린이용 휴대전화는 입학식보다 먼저 조카에게 전달되었다. 은유는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쓸데없는 얘기나 늘어놓는 이모에게 개통 통지라는 본론만 전달한 후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통화량이 한정되어 있어 전화를 오래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곧바로 문자가 왔다.
“이모제전하번호이거애요.010XXXXXXXX에요.”
“응, 저장했어.”
“야호!”
그렇게 조카와의 직통 라인이 개통되었다. 은유가 네 살, 은서가 갓 태어났을 무렵 일 년 정도 함께 살았던 시절에는 꿈도 꿀 수 없던 일이다. 말이 통하고 문자까지 할 수 있는 사이가 되다니!
내 나이가 은유와 비슷할 무렵 함께 살았던 둘째 이모는 다른 이모 삼촌보다 우리 삼 남매에게 각별한 이모였다. 결혼 후에도 시골 외할머니 댁보다 우리 집을 더 친정처럼 여겼다. 첫째 딸도 둘째 아들도 모두 부산에 와 낳고, 큰 언니네인 우리 집에서 몸조리를 했다. 어느 가을엔가 이듬해 봄이 되면 벚꽃 구경을 하러 일본에 모시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해 일이 너무 바빠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얼마 안 지나 이모는 암 선고를 받았다. 항암치료를 하느라 그 다음 봄에도 벚꽃 구경을 가지 못했다. 이후 암이 재발한 이모는 겨우 쉰 살에 우리 곁을 떠났다. 그 해 봄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나는 두고두고 후회했다. 늘 벚꽃 시즌이 되면 이모가 생각난다. 시간은 다시 오지 않으니 소중한 사람들과 후회 없는 오늘을 살아가자, 그렇게 다짐하게 되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어른의 시간과는 전혀 다를 7살의 시간, 나는 이모로서 그 소소한 순간을 함께 하고 싶었다. 어느 날 꼬부기 그림을 그렸다고 보내온 은유에게 힌트를 얻었다. 은유가 학교에 가지 못하는 시간 동안, 매일 동식물 그림을 그려 하나씩 문자로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이모의 아무 그림 챌린지'가 시작되었다.
“이모가 그린 흰 표범이야.”
“우와!저말멋있어요!”
오늘은 은유의 한글 실력을 알게 되었다.
“오늘은 알뿌리 식물, 튤립을 좋아하는 기린을 그려보았어.”
“기린눈이참예뻐요!”
띄어쓰기는 아직 못 배운 것 같다.
“은유 눈도 예뻐!”
할 말만 하고 전화기를 내팽개쳐버렸는지 답이 없다. 다음 날부터는 답신을 유도하는 문자를 보냈다.
“오늘 그린 동물은 무엇일까요?”
“고레입니다!”
“딩동댕! 맞아요! 고래입니다~”
틀린 단어를 교정해서 답을 보낸 후, 언니에게 제보를 했다. 언니는 내일 받아쓰기를 할 때 '고래'를 똑바로 쓰는지 다시 확인해보겠단다.
“오늘 그린 과일은 무엇일까요?”
“레몬입니다!”
“오호홋! 은유는 오늘 뭐했어?”
역시나 대답 없는 너. 일곱 살 조카와의 밀당에선 이길 재간이 없다.
그리고 며칠을 바빠 그림 보내기를 잊어버렸다. 사흘 만에 은유에게서 먼저 문자가 왔다.
“이모.”
“응?”
“뭐해요?”
“글 쓰고 있지.”
사실은 새벽까지 일한 후 늦잠을 자는 중이었다. 잠결에도 멋져 보이고 싶었는지 둘러대고 말았다. 소식이 없으니 이모가 궁금했던 것일까? 매일 그림을 보내는 이모의 마음을 드디어 은유도 이해하게 된 것일까? 순간 기대에 부풀었다.
'은유의 관심에 부응해야지.'
며칠 전 그려둔 해바라기를 서둘러 보냈다.
"이 식물은 무엇일까요?"
답이 없다. 내일쯤 무심하게 "해바라기입니다!"라고 문자를 주려나? 혹시 이렇게 답을 하면 어떡하지? "무슨 꽃인지 모르겠습니다!" 조바심 내던 찰나 네 시간 만에 회신이 왔다.
"해바라기입니다"
아직 마침표 쓰는 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단 걸 새롭게 알게 되었다.
사전투표를 마친 나는 4.15 총선 투표일에 조카들을 보러 가기로 했다. 언니와 형부가 투표소에 가는 동안 함께 놀아줄 참이다. 40여 일 넘는 격리 생활 중 모처럼 이모가 온다는 소식에 은유와 은서는 잔뜩 흥분했다고 한다. 이모가 언제 오는지, 하루 밤 자고 가는지 반복해서 물었단다. 은유는 처음 빠진 이빨 사진을 보내왔다. 축하 케이크를 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