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지바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여러 개의 사업이 진행 중이었다. 대표적인 사업은 현지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용 영상 콘텐츠 제작이었다. 사업이 착수된 지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다고 할만한 성과가 없어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실패 사례로 불명예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초등학교 건축사업도 첫 삽을 뜬 지 오래되었고 제대로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게다가 잔지바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미디어 인재 육성 사업은 이른 시일 내에 착수해야 했다. 전반적으로 모든 사업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아야 하는 매우 어려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사무실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시작과 동시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현지인 선임 매니저의 책상에는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여러 가지 자료를 요청하니 수북이 쌓인 서류들을 하염없이 뒤적거리기만 했다. 문서를 처리하는 속도가 그 위로 쌓이는 문서량을 따라잡지 못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자꾸만 늘어났다. 선임 매니저였기 때문에 내심 다른 직원들보다 많은 업무를 처리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쏟아지는 문서 요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 또한 업무를 파악해가면서 각종 현안에 대응하느라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다. 직원들의 역량은 내 눈높이를 전혀 맞추지 못했다. 내가 직원들에게 요청한 일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기본적인 문서 작업조차 버거워하고 있었다.
그중 한 직원 하고는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다. 현지어인 스와힐리어만 사용했기 때문에 모든 업무는 선임 매니저를 통해서 전달했다. 그는 컴퓨터를 활용하는 것도 익숙지 않아 보였다. 그러다 보니, 주로 현장에 나가서 근무할 때가 많았다.
또 다른 예산담당자는 업무 처리 속도가 달팽이처럼 매우 느렸다. 하루에 영수증 5개를 처리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했다. 안타깝지만 그것마저도 정확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들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속으로 끙끙 앓기만 했다.
“지금보다 업무 속도를 조금만 더 높여주면 좋겠어요. 하루에 영수증 10개 정도는 처리해주면 좋겠어요.”
꾹 참아왔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나한테서 싫은 소리를 듣고 난 다음 날은 몸이 좋지 않다며 사무실에 나오지 않았다.
답답함을 느낄 때면 ‘차라리 나 혼자 일하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총체적 난국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나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실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내 안에 있는 긍정의 힘을 일깨우려고 노력했다.
‘아프리카 오지마을에서는 투명 인간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이곳에는 그래도 함께 일할 직원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하지.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갖자.’
잔지바르에 부임하고 나서 첫 1년 동안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단독주택에서 근무했다. 사무실 2층이 거주지였기 때문에 나에겐 퇴근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사무실과 거주지가 붙어 있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직원들이 퇴근하고 나면 조용한 사무실에 남아 쌓인 업무를 하나씩 빠른 속도로 처리했다. 그리고 다음 날 직원들에게 전달할 할 일 목록을 하나하나 작성했다.
한국에서처럼 구성원 하나하나가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협력하는 조직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애당초 그건 불가능한 희망사항이었다. 현재의 구성원으로는 효율적으로 일을 수행하는 게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사업을 진행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행정운영경비를 확인하고 한국 본부의 도움을 받아서, 현지 직원 한두 명을 더 채용하기로 했다.
현지 지역신문과 취업 정보 홈페이지를 통해 2명의 직원 채용 공고를 냈다. 이메일을 통해 500통이 넘는 지원서가 접수되었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기가 힘든 아프리카에서 국제 NGO는 상대적으로 좋은 직장으로 꼽혔다. 그래서 채용 직종과 조건에 상관없이 채용 공고가 뜨면 무조건 지원해보는 예비취업자들도 많았다. 잔지바르에 거주하는 지원자 위주로 면접 후보군을 간추리되, 지역보다는 실무 역량과 경험을 중점적으로 확인했다.
채용 면접을 직접 진행하면서 아프리카 지원자들의 특성과 태도를 파악해나갔다.
“자기소개와 더불어 자신의 업무 역량과 강점에 대해서 말해주세요. 그리고 우리 사무소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간단히 설명해주세요.”라고 나는 말했다.
유사 분야에서의 업무 경력과 실무 역량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주로 던졌다.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우리 사무소가 어떤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채용 면접에 대한 준비가 소홀해 보였다.
“저는 탄자니아 전역에서 수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를 비롯해서 다양한 문서 작업 및 편집 도구를 잘 활용합니다. 제 실무 경험이 사무소가 추진하고 있는 미디어 교육사업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한 지원자가 당당히 말했다.
자신감 있는 태도, 타 NGO에서 근무한 실무 경험, 우수한 문서 작업 능력이 매우 돋보이는 후보자였다.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사무소의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려고 결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데 마지막으로 실무 테스트를 진행해보고 싶었다. 그에게 노트북 한 대와 탄자니아 국기가 그려진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종이에 그려진 탄자니아 국기를 파워포인트로 구현해보세요. 30분의 시간을 줄게요.”
그에게 최종 미션을 부여했다. 그는 파워포인트를 포함한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지원자에게는 너무 쉬운 과제라고 생각했다. 30분이 지나고 작업한 내용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컴퓨터를 그냥 꺼버리고 면접장을 나가버렸다. 그의 이력서는 거짓이었다.
황당한 면접 사건들이 계속 이어졌다.
“본인이 기대하는 연봉을 말해주세요.”
마지막 공통 질문은 지원자의 희망 연봉에 관한 것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인재라도 연봉이 맞지 않아 채용을 진행하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연봉이 맞지 않으면 지원자들은 합격 통지를 받고서도 아무런 회신을 주지 않았다.
“저는 매달 2천만 실링(한화 약 천만 원)을 받고 싶습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월급이 채 60만 실링(한화 약 삼십만 원)이 안 되는데 2천만 실링이라니? 너무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기존 직장에서 받은 월급은 얼마였나요?”
“매달 천육백만 실링(한화 약 팔백만 원)을 받았습니다.”
“한국 노동자가 받는 평균 월급보다 더 많이 받았군요.”
나는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사무소에서 그가 원하는 월급을 맞춰줄 수 없을뿐더러 그의 진실성에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무소의 한정된 예산을 고려하여 2명의 최종합격자로 주마와 압달라를 채용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이력서에도 다년간의 실무 경험과 우수한 문서 작업 역량이 기재되어 있었다.
사무실로 출근한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일분일초라도 아껴야 하는 상황이었다. 주마에게 문서에 나와 있는 숫자를 엑셀로 정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압달라에게는 1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2장으로 요약해달라고 했다.
중간중간에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최선을 다해서 진행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4시간이 지나고 주마에게 오늘 정리한 엑셀 표를 보여달라고 했다. 머뭇거리는 주마의 컴퓨터 모니터 위로 숫자 몇 개만이 덩그러니 표시되어 있었다.
“주마! 너 엑셀 할 줄 모르지?”
자포자기한 상태로 내가 물었다.
“음...... 어...... 조금 할 줄 알아요.”
들릴 듯 말 듯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주마가 대답했다.
“솔직하게 얘기해줘. 엑셀을 사용할 줄 아는 게 확실해? 모르면 지금부터라도 내가 가르쳐 줄게.”
어차피 새로운 대안을 찾을 수도 없었다. 채용 절차를 다시 진행하기에는 사업 리스크 너무 커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그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말문을 잃었다. 주마는 엑셀을 전혀 다룰 줄 몰랐다. 그 옆에서 독수리타법으로 문서를 정리하고 있는 압달라의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나는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오늘 하루만 똑같은 질문을 수없이 되뇌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없으랴. 어차피 우리 식구가 된 이상 내가 각별한 신경을 써야 했다.
신입이든 경력이든 이력서만을 놓고 볼 때는 큰 의미가 없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현지 직원들을 재교육시킨다는 생각으로 처음부터 하나씩 필요한 부분을 가르쳐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의 장점을 살려주는 방향에서 업무 역량도 키워주고 잠재력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열악한 교육환경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직원들을 마냥 탓할 수만은 없었다. 밀집된 교육 공간, 교사의 역량 부족, 학교 교육에 무관심한 교육 관료와 학부모 등과 같은 문제들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난 교육시스템의 문제였다. 직장인이 되기 전까지 컴퓨터 교육을 전혀 받아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력서에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작성했다가는 면접 기회조차 얻을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컴퓨터를 다룰 줄 몰라도 컴퓨터 활용 능력이 뛰어나다고 작성해둘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 이력서만을 가지고 완벽한 인재를 채용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되는 건 아니다. 현실에 맞지 않게 내 기대치가 너무 높지 않았나 싶었다. 직원들의 역량에 대한 나의 기대치를 조금 낮추기로 했다. 부족하지만 열심히 배우려는 그들의 기특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흐뭇해졌다. 나에게도 새로운 꿈이 생겼다. 먼저 그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좋은 멘토가 되어주자고 스스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들을 제대로 가르쳐서 지역사회의 리더로 키워보자는 나만의 부푼 꿈을 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