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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먼아프리카 Aug 18. 2022

위험천만한 인턴생활

  20대 중반에 우연히 좋은 기회가 생겨 유엔지역개발계획 케냐 사무소에서 인턴 활동을 경험하게 되었다. 치안이 좋지 않은 케냐였기에 국제기구들이 모여 있는 유엔본부 근처의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다. 사무실 행정 담당 직원의 도움을 받아 도보로 다닐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인도인 주택에서 홈스테이를 하기로 했다.


  다른 인턴들과 똑같이 매달 30만 원을 지불하고도 넓은 거실 끝에 위치한 와인 진열장 한쪽의 조그마한 공간을 배정받았다. 빈방이 생기기 전까지라는 조건이 붙은 임시 거주지였지만 2개월이 지나도 빈방은 나오지 않았다. 독립적인 방을 쓰는 사람들은 개별 화장실이라도 있었지만, 공용 거실에서의 하루하루는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비싼 월세는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유엔 내 식당에서 파는 음식 가격은 왜 그리 비싼지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특단의 조치를 내리지 않으면 인턴 활동을 제대로 끝마치지도 못한 채 아프리카에서 누군가에게 구걸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안타깝게도 인턴에겐 월급이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침마다 사무실을 청소해주는 젊은 청소부가 있었다. 인턴 생활을 하는 동안 청소부가 유엔본부 안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 식사하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다만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거나 집에 돌아가서 늦은 점심을 먹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왐부이! 너는 주로 어디에서 점심을 먹니?“

  인턴 생활을 끝까지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중요했던 나는 고심을 거듭한 끝에 용기 내어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유엔본부 정문 앞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어.“라고 왐부이가 대답했다.

  그녀가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 점심시간에 너랑 같이 밥을 먹으러 가도 될까?“

  나는 다시 한번 용기 내어 물었다.

  ”그래. 이따가 다른 친구들이랑 밥 먹으러 갈 텐데 함께 가자.“

  그녀가 내 요청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정문에서부터 도보로 이백 미터 정도 떨어진 길거리에 작고 허름한 식당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애타게 찾고 있던 현지 식당이었다.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저렴한 가격 하나만으로도 별 다섯 개를 주고도 남았다. 천 원을 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밥과 콩을 시켰다. 큰 접시에 담겨 나온 밥과 콩은 한국의 대학 시절에 먹던 고봉밥을 떠올리게 했다.

왐부이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왐부이! 네가 사는 곳은 어디니?“

  근처 지리를 잘 몰랐던 나는 혹시나 왐부이가 괜찮은 홈스테이 집을 소개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물었다.


  ”버스로 20분 정도 걸리는 가시에(Gachie) 동네에 살고 있어.“

  ”혹시 홈스테이 집 하나 알아봐 줄 수 있니? 10만 원 정도에 숙식이 가능한 곳이면 좋겠어.“

  한시라도 빨리 인도인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리 내가 아프리카를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거실에서 벌거숭이가 되어 내 일거수일투족을 남들에게 보여주며 살 수는 없었다.


  왐부이는 본인이 삼촌으로 모시는 가족을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정해진 계약 기간까지 인턴 생활을 이어가려면 가시에로 거주지를 옮기는 거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었다. 나의 인턴 활동을 관리하는 사무실 담당자에게 거주지 이전 사실을 미리 알렸다.


  ”제인! 제가 다음 주부터 가시에라는 동네에서 출퇴근할 거예요.“

  ”뭐라고? 가시에라고? 너는 그 동네가 어떤 곳인지 알고 말하는 거니?

  제인이 깜짝 놀라며 적잖이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청소부 친구한테 소개받아 가는 거예요. 저야 그곳을 잘 알지는 못하죠.”

  아는 사람한테서 소개를 받았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새로 이사 갈 홈스테이 집에 한 달치 숙박비와 식비를 지급한 상태였다.


  “만일 그곳에서 출퇴근하는 거라면 사무실에서 너의 신변안전을 책임져줄 수 없으니 그렇게 알도록 해.”

  평상시에는 이모처럼 다정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심각한 표정과 진지한 말투로 나를 대했다. 그녀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 보였다. 그녀의 협박 아닌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한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나에겐 근검절약이라는 생존이 달린 매우 절실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지 않을까?‘라는 안일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왐부이가 소개해 준 홈스테이 가족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비록 집주인의 큰아들과 같이 사용하는 방이었지만 나만의 침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여러모로 현재 상황에서 나에게 가장 부합하는 홈스테이 집이었다. 역시나 나는 가시에 마을의 유일한 이방인이었다. 어디서나 나를 쳐다보는 시선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저렴한 비용으로 숙식을 해결하고 덤으로 룸메이트인 큰아들과 친구가 되었다는 점이 너무나 좋았다.


  사무실에서 일과를 마치면 왐부이와 함께 마을버스를 타고 퇴근했다. 퇴근 후 홈스테이 집으로 가는 길목 곳곳에는 항상 젊은 청년들로 붐볐다. 아프리카는 대체로 실업률이 높은 편이라 끼리끼리 모여 거리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청년 무리를 자주 목격하고는 했다.


  골목길에서 왐부이와 작별 인사를 하고 홈스테이 집으로 발걸음을 향하는 길이었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나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뭔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그들을 못 본 척하고 계속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 뒤를 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한 명의 건장한 청년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뒤에 있는 나머지 청년들은 내가 메고 있는 가방을 강제로 끌어내렸다. 홈스테이 집을 눈앞에 두고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무서움을 느낀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카마우! 카마우! 카마우!”

  홈스테이 집 큰아들 이름을 큰 소리로 계속 목 놓아 불렀다. 나의 돌발 행동에 청년 일당이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그 찰나의 틈을 이용해서 홈스테이 집으로 온 힘을 다해 도망쳤다. 나를 끝까지 쫓아왔지만, 홈스테이 집 대문이 열리자마자 그들은 황급히 달아났다.


  그날 이후로 절대로 똑같은 시간에 퇴근하지 않는 나만의 원칙을 세우게 되었다. 홈스테이 집에 복귀하는 시간을 매번 달리하며 퇴근 동선을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특정 시간에 나를 기다리도록 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는 퇴근 후에 현지의 친한 친구를 만나러 시내를 나갔다. 주중에는 되도록 약속을 잡지 않았으나 개인적으로 부탁할 일이 생겨 만나기로 했다. 친구를 만나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어둠이 짙게 깔리는 시간이었기에 그날은 친구 차를 얻어 타고 복귀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친구에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혼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불행하게도 가시에 지역으로 들어가려는 택시가 한 대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을로 가는 버스를 이용했다. 마을 어귀에 도착하니 버스가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버스를 검문하고 있었다. 현지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이라고 생각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버스 안을 살피더니 나를 발견하고서 내리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들은 경찰이 아니었다. 그들의 손에는 ’팡가‘라고 불리는 날이 넓은 긴 칼이 쥐어져 있었다. 칼로 내 가방과 옷을 들추었다. 깜깜한 밤이었기에 도망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순순히 그들의 지시에 따랐다. 가방에서 여권을 꺼내 보여줬다. 그들은 내가 왜 늦은 시간에 마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지 꼼꼼하게 물었다.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되는 건가?‘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들 손에서 자유자재로 춤추고 있는 긴 칼을 보니 더더욱 겁이 났다. 다른 버스들은 아무런 제지 없이 마을 안으로 통과했다. 예전에 케냐 경찰한테 돈을 빼앗길 때도 이렇게까지 겁이 나지는 않았다. 경찰들 손에는 아무런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프리카 시골 지역에서 농작물을 벨 때나 쓰이는 날카로운 칼이 바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극한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순간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저 사람은 가시에 마을에 살고 있어요. 내가 그를 마을에서 자주 봤어요.”

  얼굴을 알지도 못하는 승객 중 한 사람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서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그들은 내가 버스에 다시 올라타도록 허락했다. 내 생명을 구해준 버스 승객한테 감사의 인사를 전할 정신조차 없었다. 버스가 마지막 정류장에 도착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전속력으로 홈스테이 집을 향해 달렸다. 홈스테이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마을 어귀에서 겪은 일을 상세히 전했다. 가족들은 진심으로 나를 위로해줬다.


  “오늘 겪은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우리는 그런 일을 겪어보지 않아서 잘 몰랐던 거 같아. 네가 워낙 붙임성 있고 활동적인 성격이라서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있다고만 생각했었어.”

  카마우가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줬다.

새로운 홈스테이 집에서 만난 카마우는 나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다.

  가시에 마을은 케냐 최대의 부족인 키쿠유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케냐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여 야당 측 경쟁 후보의 지지자들을 잔혹하게 죽인 세력이 근거지로 하는 지역이 가시에였던 것이었다. 전 세계의 폭력조직 중에서도 잔인성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무서운 갱단인 ’문기키(Mungiki)‘가 활동하는 곳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조차 사건 사고를 처리하러 가시에 마을에 들어오는 걸 꺼릴 정도였다. 홈스테이 가족들은 가시에에서 도둑을 잡으면 경찰에 인계하지 않고 타이어에 묶어 산 채로 불태워 죽인다고 했다. 절도질도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마을이었다. 종종 야밤에 총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생활이었다.


  유엔사무실 인턴 담당자가 내게 했던 말의 의미를 뒤늦게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돈 몇 푼 아끼려고 목숨을 담보로 위험천만한 생활을 했던 것이었다. 하나라도 배우고자 했던 인턴 생활이었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컸다.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현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려는 자세가 부족했다. 용기와 객기를 구분하지 못한 채 어리석은 과오를 저질렀다. 그렇게 나는 목숨과 맞바꿀 뻔한 철없는 행동을 통해 또다시 성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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