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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먼아프리카 Apr 09. 2023

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으로 만나다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잔지바르와 어느샌가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나 보다. 현지 직원들하고는 직장 상사와 부하의 상하관계를 넘어, 형 동생 하며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동시에 사무소에서 수행하던 모든 프로젝트도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달콤한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다. 나야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를 믿고 따라준 현지 직원들은 잔지바르에서의 좁은 취업문을 뚫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만 했다. 프로젝트가 끝나기 전까지 남아 있는 직원들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이대로 무책임하게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린애처럼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그들의 눈빛이 자꾸 내 눈에 밟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탄자니아 코이카 사무소에서 4년짜리 신규 프로젝트 사업 공고가 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탄자니아 잔지바르 중등교육 질 향상을 위한 통합적 교육환경 개선사업’으로 약 500만 불이 넘는 상당히 큰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4년이면 우리 직원들이 프로젝트 관리자로서 제대로 된 역량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마냥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과연 이번 사업에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예산과 내용을 대충 살펴보니 나 혼자서 절대로 준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전 직원이 온 힘을 모아 도전해도 쉽사리 마무리할 수 있는 수준의 규모가 아니었다. 모든 직원들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선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기로 했다. 


  “몇 달 후면 사무소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이 끝나잖아. 그렇게 되면 너희들도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야 하고. 다행히도 잔지바르에 신규 프로젝트 공고가 나왔어. 그래서 말인데, 너희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 나랑 같이 이번 프로젝트에 도전해 볼래? 아니면 현재 프로젝트가 끝나면 각자 자기 길을 가고 싶니? 중요한 건 너희들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동의하지 않으면 나도 이번 프로젝트를 끝으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어.”

  생각지도 못한 나의 질문에 직원들의 침묵이 이어졌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고요함을 깨고 이브라힘이 말을 이었다.


  “내 경험을 비춰볼 때 정말 힘든 작업의 연속임에 틀림없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따를 수도 있어. 그래서 너희들의 굳은 각오와 다짐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

  직원들에게 섣부른 희망을 안기고 싶지 않아서 솔직한 내 생각을 전달했다.


  “어떻게 준비하는 거예요?”

  하마드가 물었다.


  “그건 내가 먼저 고민한 후에 알려줄게. 사업제안서 목차를 일차적으로 만들어볼 테니 그 이후에 다 같이 논의해 보자.” 

  처음 접해보는 형식의 일이라서 그런지, 직원들은 신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지에 대해 크나큰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우리 스스로 부족한 역량을 잘 알고 있었기에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직원들 모두가 쭈뼛댔다. 며칠 뒤 나는 확실히 마침표를 찍기 위해 다시 한번 직원들에게 최종 의견을 물었다. 


  “아직도 고민하고 있니? 뭐가 두려운 거니? 실패하더라도 한번 도전해 보는 거지. 그게 아프리카의 정신이지 않니? 중요한 건 우리는 잃을 게 없잖아. 서로 협력해 나가는 과정에서 얻게 될 경험과 지식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자산이 될 거라고 믿어. 각자 갈 길을 갈래? 아니면 우리 함께 힘을 모아 도전해 볼래? 

  “우리 다 같이 힘을 모아 도전해 봐요. 인샬라!”

  모든 직원이 신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것에 동의했다. 

인적 드문 곳의 호텔에서 신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는 직원들 모습

  나는 직원들의 용기에 힘을 얻어 동심동력하며 분발하기로 다짐했다. 필요한 준비사항들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갔다. 그동안 축적해 온 모든 경험과 역량을 투입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춰 나갔다. 그렇더라도 소수의 우리 직원들만으로는 인력이 부족했다. 탄자니아 지부의 협조를 구해 한 사람의 추가 인력을 파견받기로 했다.


  어찌 됐든 간에 신규 프로젝트에 도전하기 위한 준비팀이 꾸려졌다. 물론 대부분의 직원들이 프로젝트를 기획해 본 경험이 전무했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우리 사무소로 파견 온 직원만이 프로젝트 기획에 대한 약간의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었다. 현장에서 사업을 관리하는 일만 해오던 직원들에게는 어쩌면 너무나도 생소한 작업이었다.


  나는 일차적으로 프로젝트 기획이 처음인 직원들을 대상으로 사업 기획보고서 작성법부터 교육하기로 했다. 여러 개의 기획보고서 샘플과 관련 자료를 공유하면서 우리가 준비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의 대략적인 개요를 알려줬다. 추진배경을 시작으로, 사업목표, 추진방향, 세부실행계획, 향후일정까지 제안서 작성에 필요한 일련의 흐름을 설명해 줬다. 


 ‘이게 웬 외계어냐’고 묻는 듯한 직원들의 얼굴 표정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내가 사무소에 처음 부임해서 직원들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설명할 때 느꼈던 표정과 똑같았다. 우리는 사무소가 기존에 추진하고 있는 사업들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신규 프로젝트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짬짬이 틈날 때마다 새로운 프로젝트의 기획 방향성에 대해 반복적으로 설명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 스스로가 프로젝트가 추구하는 가치의 큰 그림을 이해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움직이는 길 위에서 낭비되는 시간과 에너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직원들과 상의 끝에 워크숍을 가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주말도 반납하고 일주일간 인적이 드문 시골 마을로 워크숍을 떠났다.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10시부터 밤 12시까지 사업제안서를 작성하기 위한 강행군을 거듭했다. 오전에는 자료를 수집하고 오후에는 제안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모두가 돌아가며 진행사항을 공유하며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워크숍이 진행되는 동안 직원들은 대단한 열정과 뜨거운 열의를 보였다. 물론 저녁에는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 꾸벅꾸벅 졸기를 반복했다. 그런 직원들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규 프로젝트 수주라는 목적을 위해 우리 직원들이 지금의 힘든 과정을 잘 이겨 내리라 생각했다.


  밤낮없이 교육사업 제안서 작업에 한창이었다. 나는 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고심했다. 바쁜 일정이었지만 워크숍을 통해 그들이 느끼고 배운 점을 듣고 싶었다. 워크숍을 다녀오고 난 다음 토요일, 우리는 직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중식당에 모였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지난 며칠 간의 심정을 공유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직원 중 한 명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지쳤다’면서 언성을 높인 채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너무 힘들어요. 더 이상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일을 못 하겠어요. 그만 쉬고 싶어요.”

  압둘라가 붉게 충혈되어 움푹 들어간 큰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날카롭게 말했다. 다른 직원들도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사무실에서 밤샘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직원들 모습

  다들 처음 경험해 보는 강행군에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들 모두가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는지 어느 순간 나는 직원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왜 나라고 힘들지 않겠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내 감정을 꾹 참아 눌렀다. 나도 사람인지라 사실 많이 지치고 힘든 상태였다. 그렇지만 직원들 앞에서는 힘든 내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 같아서 순간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힘겹게 입을 뗐다.


  “나도 너희들이 고생하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어. 모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많이 힘들었을 테지만 묵묵히 나를 믿고 따라와 준 것도 진심으로 고맙고. 너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해줬기 때문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 이제 사업제안서를 제출하는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잖아.”

  “하지만 모두가 힘들어하니까 나는 다시 한번 너희들의 의견을 마지막으로 묻고 싶어. 지금이라도 사업제안서 작업을 그만두기를 원하니?”

  직원들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며 내가 물었다. 내가 물었다. 그만두고 싶은 직원이 한 사람이라도 나온다면 나는 지금껏 해온 작업을 멈추고 도전을 포기하려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몇 초간의 정적이 이어지고 나서 압둘라가 대답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해볼게요.”

  불만을 표출했던 압둘라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다른 직원들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며 지금까지 해오던 작업을 끝까지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되새겼다. 다만 주말마다 모여서 일하는 것을 최소화해 달라고 요청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들의 의견을 수용했다. 결국 주말 작업은 온전히 내 몫으로 돌아왔다. 서류 보따리를 집으로 들고 와서 그렇게 혼자만의 외로운 작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몇 주간 홀로 주말에도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해나갔다. 나도 모르는 새에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체력은 바닥나 있었다. 그날도 평상시 주말처럼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호흡에 불편함이 느껴졌다. 머리가 핑 돌 듯이 어지러웠다. 가슴이 옥죄는 통증도 찾아왔다. 집 안이 동굴처럼 느껴지더니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내가 느끼는 증상을 찾아보니 공황장애 초기 증상이었다. 호흡 곤란은 그래도 버틸만했다. 아니 버텨야만 했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감을 견디는 게 제일 힘들었다. 집 안의 모든 창문을 열어놓았지만, 동굴 속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 채 죽을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여기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라는 공포감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업무 강도로 일을 계속 진행할 수는 없었다. 업무 속도를 조절하지 않으면 나로 인해 모든 기회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열심히 따라와 준 직원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작성해 온 사업제안서를 일차적으로 끝마치는 것이 급선무였다. 제안서 제출일까지 시간이 촉박했다. 때마침 신규 프로젝트 제안서를 만들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준 잔지바르 국립대학교 교수가 생각났다. 그녀에게 우리의 어려운 현 상황을 설명하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녀는 잔지바르 교육 체계를 잘 아는 전문가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원들의 헌신과 그녀의 도움 덕분에 마감 기한 내에 무사히 사업제안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얼마 후 우리의 사업제안서가 1차 서류심사에서 통과했다는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기쁨도 잠시, 서류심사에 합격한 기관들을 대상으로 2차 발표평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곧바로 우리를 서둘러 머리를 맞대고 발표평가 자료를 만들었다.

 

  우리가 제안한 교육사업과 관련하여 현지 평가위원들의 세부적인 질문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막판에 많은 도움을 받았던 잔지바르 대학교 교수와 함께 발표장소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녀도 흔쾌히 함께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발표 전날에 그녀는 개인 사정으로 발표평가 장소에 갈 수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왔다. 


  발표 당일, 나와 우리 직원들만이 발표평가가 진행될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날까지도 나는 직원들과 밤늦게까지 잔지바르 교육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에 대해 논의하며 의견을 나눴다. 그만큼 나는 이번 신규 프로젝트의 수주에 최선을 다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열심히 준비해 온 만큼 나는 발표평가에 앞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고취되어 있었다.


  호텔 로비에서 발표 순서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는데 하마드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숨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현지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신규 프로젝트에 대한 자문을 자주 구했다. 

  “지금 큰일 났어요.”

  영문을 모르는 나로서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어쩔 줄 몰라하는 몸짓을 보면서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 그래?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거야?

  ”우리 발표 앞 순서인.........지금........ 우리에게 도움을 준 잔지바르 교수가.....발표를 진행하고 있어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사업제안서 작성을 위해 우리랑 협력했던 그녀가 다른 기관을 대표하여 우리 앞 순서에서 발표를 진행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소름이 돋았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마드에게 재차 물었다.


  ”프로젝트를 함께 준비해 오던 교수가 다른 기관을 대표하여 발표하고 있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확신할 거야?“

  나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은 순간적으로 온갖 이상한 상상으로 가득 찼다.


  ’이게 정녕 사실인가‘

  ’정말 그녀가 우리를 배신한 건가‘

  ’왜 하필이면 내 발표를 앞두고 이런 일이 터진 거지?‘

  ’그래서 우리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우리에게 모든 자료를 요청했던 것인가?‘

  ’개인 사정으로 발표장에 오지 못하겠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던 거구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이 나를 괴롭혔다. 영화 속에서나 보던 일을 내가 현실에서 직접 겪을 줄을 꿈에도 몰랐다. 


  그동안 힘들게 작업해 온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번아웃이 왔어도 제대로 쉬어 보지 못하고 지금껏 달려온 나였다. 마음 편히 주말에 반나절만이라도 휴식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질 못했다. 어쩌다 휴가를 내고 숙소에서 쉬고 있을 때도 직원들이 도움을 요청하면 일을 처리해 줬다. 내가 다 좋아서 자청한 일이었다. 지친 몸과 마음이었지만 잔지바르 지역사회와 우리 직원들만을 생각하며 여기까지 잘 버텨온 나날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행동했던 스스로가 정말 원망스러웠다. 


  힘겨운 날들을 견뎌왔건만 나는 잔지바르에서 일생일대 최고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업 수주를 하지 못하더라도 이번 프로젝트는 다른 누군가가 잔지바르 지역사회를 위해 추진할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이번 발표평가는 우리 직원들의 노력에 대한 보상과 희망찬 미래가 걸린 중요한 일이었다. 나는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지만 짧은 시간 내에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평가장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내 눈을 애써 피하며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종종걸음으로 재빨리 평가장을 빠져나갔다. 발표 연단 위에 서서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나는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몇 번 내쉬었다. 찰나에 또 다른 잡념이 나를 무겁게 내리 덮었다.


  ’내가 그녀보다 발표를 먼저 끝내고 이 소식을 접했다면 어땠을까?‘

  뒤늦은 아쉬운 마음이지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발표 도중에도 마음을 다잡는 게 쉽지 않았다. 배신감에 치가 떨렸고 그녀의 뻔뻔한 얼굴 표정이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직원들을 떠올리며 실수 없이 발표를 끝마쳤다.

  발표를 무사히 마치고 문밖을 나서는데, 마음속은 온통 공허함으로 가득 찼다. 집으로 돌아와 지난 일을 돌이켜보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복기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걸까?‘

  잔지바르 국립대 교수는 우리와의 협력을 통해서 우리가 작성한 사업제안서를 손쉽게 자기 수중에 확보할 수 있었다. 비즈니스에는 상도가 있고 프로젝트에는 직업윤리가 있건만, 그녀는 우리 사업의 내용물만 쏙 빼먹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직원 중 한 명이 그녀와 내통했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 무대 위에서 일생일대의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곳에 단 1초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공황장애까지 겪어 가며 사업제안서를 작성했는지 하는 막심한 후회가 들었다. 우리 사무소에 침 뱉는 행동이었기에 이번 사건에 대해 외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몇 주가 흐르고 나서 발표평가 결과를 통보받았다. 우리 사무소가 신규 프로젝트의 수행기관으로 선정된 것이었다. 우리 직원들이 모두 기쁨의 환호를 내질렀다. 나는 우리가 사업을 수주했다는 기쁨보다는 우리를 배신한 그녀가 사업 수주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더욱 통쾌했다. 

아프리카 친구들과 함께 한 신규 프로젝트 기획은 힘겨웠지만 행복한 경험이었다.  

  사업제안서 준비과정 속에서 우리 직원들의 프로젝트 관리 능력과 업무에 대한 자신감 또한 부쩍 향상되었다. 우리가 사업을 수주했다는 결과도 뜻깊었지만, 직원들이 다양한 업무 경험을 쌓았다는 사실에 나는 굉장히 만족했다. 무엇보다도 직원들에게 계속해서 일할 기회를 만들어주었다는 것이 너무나 뿌듯하고 행복했다.


  나도 이번 기회를 통해서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되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심한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세상을 조금 더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 있으면서 스스로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때가 많았다. 


  ’나는 왜 다른 곳도 아닌 아프리카를 위해서 일하고 싶어 하는 걸까?‘

  나는 진심으로 아프리카 친구들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미약하나마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철없고 겁 없던 시절의 나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프리카 오지의 가난한 할머니께서 내게 보여준 넓으신 아량은 지금의 내가 거대한 세상 앞에 겸손한 자세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프리카의 지역공동체 발전과 주민들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많은 원조기관들이 지금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경우를 접할 때가 종종 있었다. 프로젝트의 애초 목적과 취지는 온데간데없고 누구 할 것 없이 프로젝트를 통해 뿌려질 예산에만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공공의 이익보다 사익을 위해 개발 프로젝트를 이용하는 사람이나 기관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일은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라면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돈 앞에 장사 없다‘라는 말이 있겠는가. 


  그래도 중요한 건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들 덕분에 아프리카 사회도 느리지만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희망찬 미래를 향해 내딛고 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아프리카의 평범한 영웅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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