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보수가 없다
(이 영화가 흥행한 데에는 보수 정당 뿐만 아니라 보수 성향의 언론의 역할 역시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에 대해서는 민주언론시민연합의 다음 기사를 참고하라. "이승만 미화 일색 <건국전쟁> 흥행 불지핀 조선일보, 38건 보도 압도적", 민주언론시민연합, 2024년 2월 23일)
지난 4월 19일 영화 <건국전쟁>의 감독 김덕영이 전쟁기념관에서 강연을 열 예정이었다고 한다. 건국전쟁 영화 자체로도 말이 많은데 하필 4.19 혁명이 일어난 날에 그런 일을 벌이다니. 언론의 포화에 당일 강연은 취소됐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웃기지 아니한가. 국민 정서에 맞지 않은 "독재자 찬양"이라지만 이 영화는 무려 용산 대통령실에서 그리고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관람한 영화 아닌가. 이번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했지만 그것은 소선거구제에 따른 결과로 국민의 상당수는 그 정당에 표를 던졌다. 하여튼 보수를 자처하는 현 여당은 이 영화를 물고 빨고 있는데 나는 이게 아주 웃긴 일이라 생각한다.
건국전쟁을 추앙하는 이들은 되도 않는 소리로 이 영화를 옹호한다. 현재 영화판이 좌경화 됐기 때문에 이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영화가 있어야 한다고. 심지어는 이것을 국제적인 범위로 확장시켜 디즈니 PC 좌익 VS 공화 보수 건국전쟁... 같은 요상한 '문화전쟁'이라는 개념으로도 빤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대기업 편들고 자기들끼리 카르텔 만들기? 미국 형님이 시키는 대로 무작정 따라가기? 아니면 무작정 북한을,,, 몰아내자,,,!! 뭐 이러면서 반공 멸콩 챌린지하기? 저들이 말하는 보수란 죄다 단편적인 파편들 뿐, 어떠한 종합적인 사고 체계가 아니다. 저들에게 어떠한 신념이란 게 있을 리가.
오늘날 한국 보수 여당을 비롯해 한국 정계에 신념이 없다면 보수 영화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마찬가지다. 그 영화들은 단편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고 단편적인 방식으로 칭송된다. <연평해전>은 북한에 맞서는 영화니까 애국 보수 영화이고 <인천상륙작전>은 북한 괴뢰들의 무서움을 담았으니 애국 보수 영화고 <국제시장>은 박정희의 공, 산업화를 다뤘으니 애국 보수 영화란다.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다면 저 영화들이 한국 영화계에서 받는 취급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어느 우익 네티즌들은 이런 의견을 제시한다. "아니 이보쇼 영화판이 좌편향 돼서 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거라고." 혹자는 박평식의 천안함 프로젝트 별점을 들고 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양심이 있다면 이 영화가 잘 만들었다고 칭송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의문이다.
모든 건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국에는 '보수'가 없다. 한국이라는 땅은 일제 시대와 박정희 시기의 산업화를 겪으며 모든 것이 파괴된 땅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영화를 보고 싶다면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불명>을 추천하는 바이다. 혹시라도 에...? 김기덕은 문재인 지지한 개씹 좌빨 성범죄자 아니냐고 반문할거면 그대로 나가서 앞서 상술한 영화들이나 보며 애국 보수를 외치면 된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는 자네들은 문화전쟁에서 이길 수 없겠지만.
말이 나온 김에 <수취인불명>을 보자. 수취인불명을 나는 한국에 몇 없는 보수 영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김기덕 본인은 보수주의자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하지만 수취인불명이 보여주는 보수란 그네들의 자유민주주의 웅엥웅과는 많이 다르다. 그들이 찬양하는 <국제시장>이 박정희 시기 대한민국의 위대한 산업화와 경제 성자에 주목하는 것과 달리 수취인불명은 박정희 시기 파괴된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수취인불명은 그들의 신화와는 다르다. 나는 수취인불명을 보수 영화라 소개했지만 그럼에도 본작은 보수 그 자체에 대한 것을 다루지 않는다. 그들의 신화가 우리가 쌓아올린 것에 대한 이야기라면 수취인불명은 파괴되는 형국을 다룰 뿐이다. 본작은 이 자체로 한국 보수에 대한 증언을 하는 듯하다.
근대화와 산업화에 따른 전통적 가치의 유린과 파괴라는 이 영화의 보수성을 알아보고 칭송하는 보수라는 놈들은 정작 없다. 왜냐면 이들이 빠는 것은 87체제 이후 만들어진 '한국 보수'라는 거짓된 환영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계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말이 지금과 같이 쓰이게 된 것은 87년 민주화 이후이다. 87년 체육관 선거라 불리던 허울 뿐인 선거가 사라지고 국민 개개인이 표를 행사하는 일명 '민주화의 시대'가 열렸다.
어떤 종류의 보수 정당 지지자들은 보수/진보 각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보수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판이라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87체제 이전 보수와 진보는 흔히 일상에서 사용하는 그 용례에 한해서 사용됐으며 지금과 같은 정치적 용어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축적된 각 단어에 대한 일상적 이미지는 정치적 용어로 쓰이는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단어 '보수'의 시대에 따른 사용 변화를 자세히 알고 싶다면 권용립 교수의 <보수>를 추천한다.)
보수라는 단어의 정치적 의미가 조급히 형성되는 과정은 민주화 이후 보수라는 단어가 얼마나 조급하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준다. 보수라는 단어의 정의도 얼렁뚱땅 이뤄진 마당에 그것의 가치관에 대한 검토가 면밀히 이뤄지고 통상화 될 수 있었을까?
이들이 이익집단일 뿐이라는 증거는 차고 넘치지만 단적인 예를 들자면 통일민주당과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탄생시키게 된 삼당합당을 제시할 수 있다. 결국 삼당합당으로 끝났지만 원래는 김대중의 평화민주당까지 포섭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렇다. 이건 그저 야합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결론은 이렇다. 그네들이 말하는 보수가 명확하지 않은 세상에서 보수 영화를 만들라고 하니 그것을 만들지 못하는 거라고. 비록 적은 사례로 존재하는 일이지만 언급도 했으니 짚고 넘어가자면 그것을 만들더라도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거라고.
한국 보수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한국 보수가 뭔지 정의하는 게 우선으로 보인다. 안 그런다면야 2찍, 국힘, 반운동권, 반북, 친재벌. 친미 등과 같은 막연한 키워드로만 존재하는 파편으로 끝날 담론이니.
(2024년 4월 21일에 작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