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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백하 Jun 20. 2024

존 오브 인터레스트 후기

 기대보다 좋았다. 기대를 많이 했으나 동시에 "또 '홀로코스트'라는 오래된 단골 소재.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와 "사실 이 영화가 소재로 푸쉬되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의문감을 안은 채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관람하였다. 확인한 결과, 그 의구심은 다행히도 빗나갔다.


 영화의 시작이기도 한 암막으로 시작을 하자. 음악 소리와 함께 영화는 몇 분 가량 검은 화면만을 보여준다. 이 작업을 통해 영화와 관객 사이에 하나의 진입 장벽을 설치 이 이야기가 일단 재현됐다는 걸 전제로 깔고 간다. 그것이 성공했다는 듯 나오는 떼 하나 안 낀 수용소 너머의 루돌프의 집은 노골적으로 세트의 모습이다.


 이 세트가 형성하는 공간은 거대한 경계를 만들어낸다. 가장 두드러지는 수용소의 장벽부터 헤트비히 부인이 개를 자신의 방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한 장면을 유대인 배제의 철저한 배제와 연관시키는 부분이라든지.(나치당이 세계 최초로 근대적 동물보호법을 만든 일화는 유명하다. 그들에게 유대인은 한낱 개보다도 못한 인간이 아닌 존재였다.) 경계로 수용소와 외부인들은 철저하게 단절돼 있으나 그들은 '소리'까지는 막지 못한다. 유대인들이 불 타 죽는 끔찍한 비명 소리는 루돌프의 마당을 메우고 그것은 당연시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 사이에 홀로코스트의 흔적을 군데군데 들어낸다. 아이들이 노는 물 속에서 뼈조각이 발견되고, 수풀 사이로 유대인들이 끌려가고, 음향은 유대인들이 불에 타 죽는 시간이다.      


 이 작업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학살극을 지휘하는 루돌프의 모습을 하얀 화면으로 가득 채우는 것과 완벽하게 반전된다. 그리고 이 하얀 장막은 유대인을 한줌 재로 만들어버리는 것마냥 나쁜 마녀를 화덕에서 태워버리는 동화 속 이야기로 이어진다. 암막을 기초로 하는 세트장이 그러하듯 적외선 카메라 속 공간은 검은색을 기초로 깔아놓고 있다. 그리고 그 위애서 하얀 소녀는 하얀 연기와 함께 동화와도 같은 반복적인 일을 행한다. 정작 소녀는 어려운 이를 도우라는 지극히 당연시되는 규칙을 따르고 있으나 그렇기에 영화 내에서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당연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장면으로도 작동한다.


 만약 영화가 그저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의 일상을 다루는 것으로 그쳤으면 나는 이 영화를 그냥 잘 만든 웰메이드 홀로코스트 영화구나 하고 시큰둥하게 보았을 것이다. <페르시아어 수업>에서의 나치 군인들의 일상이 흥미로웠던 바, 그 연장선상에서 흥미롭게 보는 정도로만.


 영화 시작의 암막 이후, 강 옆에 서있는 루돌프는 속옷만 입고 無言의 나신을 드러내고 있다. 루돌프의 체형은 근육질의 멋진 몸매도 아니나 그렇다고 추하지도 않은 극히 평범한 모습이다. 여기서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우선 말하자면 딱히 그 개념을 논하려는 건 아니다.


 여기서 옷은 별다를 바 없는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서 사용된다. 이 장면은 영화 중반부에 가서 그대로 재현된다. 군복을 입은 루돌프는 나치 독일의 장교로서 말한다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루돌프는 나치 독일의 군인으로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에 최선을 다한다. 루돌프는 커다란 사각형의 상 속에 갇힌 나치 독일의 군인들을 내려다본다. 그 시점에서 부감으로 내려다 본 사각형 속의 군인들 역시 거적대기를 입은 수용소 속 유대인과 옷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존재로 격하된다.


 루돌프 역시 뒤뚱대며 안구가 가려진 한 사람으로 존재할 때, 유대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다.


 그런 루돌프는 <액트 오브 킬링>에서 안와르 콩고가 그리하였듯 구역질을 하기 시작한다.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공감의 상실과 고립돼 간다는 공포감에서 나온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로 보인다. 그리고 마치 벽 속에 상을 인화하는 바늘구멍 카메라를 보는 듯한 작은 구멍 너머로 루돌프는 미래를 보게 된다. 그 미래는 그들의 홀로코스트 수용소가 패전 후 박물관으로 변해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수용소 안이 처음 등장했음에도 박물관의 모습이란 어딘가 낯이 익다. 영화는 학살당한 유대인들의 옷이 가득 쌓인 유리벽 너머의 박물관 청소부를 평면 쇼트로 보여준다. 루돌프 집에서의 일꾼을 트레킹 쇼트로 찍은 것과 매우 흡사한 장면이다. 박물관에서의 청소는 나치 독일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매우 사무적으로 무정하게 이뤄지고 있다. 유리벽 너머의 사각형 안에서 무참히 재로 변한 인간 정체성의 흔적을 뒤로 한 채...


 때문에 미래에도 그러할 것을 깨달은 그는 고립의 공포에서 벗어나 구역질을 멈춘다. 곧 이어 화면은 다시 소리만이 가득한 길고 긴 암막으로 전환된다. 홀로코스트라는 소재를 깔고 감에도 나름 도발적이라면 도발적인 이 엔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긍정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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