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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은수 Sep 09. 2018

인문의 임무를 생각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


『법철학』에서 헤겔은 철학에 ‘황혼 무렵에 날라’는 임무를 부여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말을 오해하는 듯합니다. 철학이란 뒤늦게 말하는 일, 즉 지금 이 순간의 삶에는 별 도움이 못 되는 철지난 이야기나 하는 짓쯤으로 말입니다. 사실, 이런 건 ‘정보’의 일입니다. 이미 정해진 이야기나 늘어놓으면서 세상이 자기 말대로 돌아간다고 우쭐대는 것, ‘지식 장사꾼’이나 하는 짓이 철학일 리 없습니다. 철학이 이런 일을 한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철학의 일은 따로 있습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

헤겔이 말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지혜’를 뜻합니다. ‘황혼’ 무렵에 지혜가 생겨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황혼은 우리가 한 일이 분명해지는 때입니다. 하루의 일이 끝나고 저녁이 되면 이미 해결될 일은 해결되고, 여전히 남은 일은 남습니다. 한낮의 분주함 탓에 귀결을 알 수 없던 사건들이 마침내 일목요연해집니다. 이럴 때 머릿속이 비로소 명증해지지요. 헤겔에 따르면, “철학은 언제나 너무 늦게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헤겔은 이어서 말합니다. “철학이 세계에 대한 ‘사상’인 한, 현실이 그 형성 과정을 완료하여 자기를 완성한 후에야 비로소 철학은 시간 속에 나타난다.” 황혼이라는 말에 홀려서는 안 됩니다. 사상은 ‘시간 너머’에, 즉 본질에 닿아 있다는 것, 형이상의 차원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황혼’이 아니라 ‘명증성’입니다. 철학은 ‘앎을 명확히 하는 일’, 즉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일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의 경구를 빌려서 이를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정식화했습니다. ‘너 자신의 무지’를 깨달으라는 뜻이죠. 지혜는 한마디로 ‘무지의 명증성’을 의미합니다.

헤겔, 『법철학』, 임석진 옮김(한길사, 2008)

무지란 무엇일까요.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무지란 지식의 결여가 아니라 지식의 포화 상태로 인해 미지의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헤겔은 어리석게도 자기 시대에 철학이 완전한 명증성에 도달했다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헤겔 이후에도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여전히 우리의 무지를 향해서 날아오릅니다. 이성이 쉬는 칠흑의 밤에도, 탐구가 사라진 어둠 속에서도 명증성을 향한 비상을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의 앎이 불구라는 것, 완전하지 않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는 것, 세상에는 여전히 신비로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지혜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호기심을 부추기며, 공부를 멈추지 않도록 만듭니다.


철학의 지혜는 정보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적대적이기도 합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정보는 명령입니다. 문제가 이제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정해진 절차를 좇아서 수행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탐구를 멈추고 ‘좋아요’나 누르라고, 텔레비전 앞에서 알아야 쓸모없는 조각 지식이나 즐기라고, 자신이 판매하는 예전에 낡아빠진 상식의 요약이나 읽으면서 자기를 계발하라고 재촉합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칸트는 계몽이 우리를 ‘미성숙’에서 해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미성숙’이란 “이성을 사용해야 할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책이 우리의 이해를 대신할 때, 정신적 지도자가 우리의 양심을 대신할 때, 의사가 우리의 식생활을 결정할 때, 우리는 ‘미성숙’ 상태에 있다고 칸트는 주장합니다. 누구도, 무엇도, 설령 신조차도 우리 앎을 ‘대표’(representation)할 수 없습니다. 지혜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스스로의 힘으로 ‘감히 알려고 하라’는 의무를 기꺼이 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문의 심장입니다. 인문은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카프카)의 형식으로만 존재합니다. 자기 내부에 있는 무지를 드러내고, 앎에 대한 탐구를 또다시 반복하게 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합니다. 인문은 대중화될 수 없습니다. 대중이 인문화되어야 합니다.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예능 인문학’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습니다. 




《기획회의》제471호 ‘#예능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에 「여는 글」로 쓴 글을 조금 보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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