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지막에 생각하다
“사랑은 시간의 노리개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말이다. 덧없이, 홀연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인생을 걸고 지킬 만한 가치를 찾은 이는 얼마나 행복한가. 영국의 문호한테는 사랑이었다. 그는 사랑의 힘으로 불멸의 흔적을 쌓아서 시간과 맞서고자 했다.
2018년이 사흘만 남았다. 줄리엣의 표현을 빌리면, “마치 ‘번개가 치네’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라지는 번개”와 같이 또 다시 한 해가 흘러갔다. 물론 스피노자는 여전히 사과를 심고 있을 터이고, 태공망은 강가에서 낚싯줄을 내리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할 일을 깨달아 시간의 문턱을 두려워하지 않을 이들은 얼마나 다행인가. 올해와 다르지 않게, 그들은 내년도 할 일을 반복할 것이다.
하지만 한낱 먼지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대부분은 새해의 결심과 연말의 후회를 반복하면서 일생을 살아간다. 이렇게 살아도 정녕 괜찮단 말인가.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어크로스)에는 인생 새로 고침, 즉 ‘작심’이 사흘만 가는 이유가 나온다. 인생을 바꾸려면 행동의 지휘자인 뇌의 정보처리 경로를 고쳐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먹는 음식 에너지를 25%나 사용하는 뇌는 지극히 에너지 효율적으로 움직이므로 일단 고착된 습관을 좀처럼 바꾸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 중 고작 10% 정도만 ‘올해는 책 좀 읽으리라’ 결심하고, 실제로 연말까지 꾸준히 책을 읽는다. ‘인생 리셋’은 열 중 아홉이 실패하는 대단한 일이므로, 처음부터 어떤 습관으로 뇌를 길들이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나 나쁜 습관이 이미 들어섰다면 어떻게 할까.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란 말인가. 지금까지와 다르게 인생을 사는 것은 불가능할까. 당연히 우리는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삶을 리셋하는 능력을 가지도록 뇌가 고도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연례행사인 ‘후회’가 바로 진화의 기나긴 도정에서 인류를 포함한 소수 영장류만 획득한 ‘인생 리셋의 능력’이다. 후회는 실망이 아니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실망이란 무언가를 선택했을 때의 기댓값에 실제 결과가 못 미쳤을 때 생겨나는 감정이다. 실망하는 사람은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후회는 A를 선택한 결과와 B를 선택했을 때 기댓값을 비교해 더 나은 결과가 가능했음을 깨달았을 때 솟아나는 감정이다. 떠올릴 수 있는 한 또 다른 인생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한 해를 열심히 살아온 자신한테 실망하지 말라. 실망하는 자는 송년의 술을 쓰디쓰게 할 뿐 자신의 미래를 새롭게 디자인할 수 없다. 후회할 수 있다면 인생은 아직 괜찮다. 그러니 오늘의 후회를 뼈저리게 즐겨라. 후회하는 자만이 삶을 다시 계획하여 앞날의 또 다른 삶을 기약할 수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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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책과 미래’ 칼럼입니다.
매주 한 편씩, 벌써 한 해 반을 써 왔네요.
언젠가 다 모아 놓고 읽고 나면 저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을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