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고 위로하고 공감하며… 책의 모험은 계속된다
연말연시가 되면 트렌드 서적이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2018년에는 극히 심했는데, 김난도 등이 매년 펴내는 『트렌드코리아 2019』(미래의창)가 처음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현재가 요동쳐 불안이 가중되고 변화가 극심해 앞날이 캄캄하다 느끼면, 바람의 목소리를 듣거나 거북이 등딱지라도 들여다보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세상을 움직이는 더 큰 힘들(forces)이 자잘한 물결들(trends)을 일으키는 법이다.
앞날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매트 리들리가 ‘이성적 낙관주의’라고 부르는 거대한 흐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빈곤’에서 ‘부유’로, ‘독재’에서 ‘민주’로, ‘차별’에서 ‘평등’으로, ‘전쟁’에서 ‘평화’로, ‘경쟁’에서 ‘협력’으로, ‘고립’에서 ‘연결’로 진화해 왔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동아시아)이 보여준 것처럼, 신분이나 돈에 따른 차별이 아직도 만연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류는 힘닿는 선까지 교육, 의료, 복지,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소수만(또는 남성만) 누리던 것을 전체의 혜택으로 만들어 왔다.
물리적 세계는 물론 무작위적이다. 하지만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인류가 의미를 불어넣어 가는 방향은 명확하다. 그것은 페트라르카가 말한 바대로, “야수성의 옷을 벗고 인간성의 옷을 입는 법을 배우는 일”이요, “자연 상태의 인간(homo)이기를 멈추고 진화된 인간(vir)이 되는 일”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더 나은 인간’으로 사는 길, 이것이 우리 문명을 이룩한 근본정신이다. 『고기로 태어나서』(시대의창)나 『고통을 나눌 수 있는가』(나무연필) 등이 그러했듯, 삶의 뼈아픈 현장을 기록하고 사유를 투자함으로써 더 나은 삶을 일으키려는 책의 분투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의 모습을 바꾸어 가는 가장 거대한 힘은 기술, 그중에서도 정보를 이용한 기술로부터 나온다. 정보가 모든 관계에 스며들고 모든 사물과 결합해서 ‘창발적 현상’을 빚어낸다. 세상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는 이러한 복잡한 세계에서는 기존에 아무 규칙이 없어 보였던 것에서 규칙을 찾는 능력, 즉 『전체를 보는 방법』(에이도스)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정보의 힘이 창출해 내는 새로운 가치를 알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 미래로 가는 길을 앞서서 열어갈 수 있다.
아주 간단한 조작만으로 생명정보를 손쉽게 편집할 수 있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이 확보된 현재의 혁명적 상황을 생각할 때, 알파고의 충격(인공지능)에 이어서, 무엇보다 정보생물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크리스퍼가 온다』(프시케의 숲), 『송기원의 포스트게놈 시대』(사이언스북스)처럼 인공생물학과 관련한 움직임을 담은 책들이 올해도 분명히 대중의 진지한 관심을 끌 것이다. 물론 인간 심리의 비밀을 서서히 파헤치는 중인 뇌 과학과 인지과학이 여전히 폭발성이 가장 크며, 앞으로도 당분간 같은 흐름을 이어갈 것이다. 『열두 발자국』(어크로스), 『우울할 땐 뇌 과학』(심심), 『지능의 탄생』(바다출판사) 등의 베스트셀러가 이미 이를 증명했다.
그러나 책의 세계를 실제 움직이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고,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며, ‘거대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이다. 소소한 삶의 문제들을 매개로 깊은 통찰을 던져주는 『당신이 옳다』(해냄),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홍익출판사) 등 심리학 책의 강세는 결코 잦아들지 않는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흔), 『아임 낫 파인』(팩토리나인) 등 언니들의 ‘공감’과 ‘위로’와 ‘조언’ 역시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정보로 연결돼 누구나 글을 쓰고 독자를 만나는 세상은 온갖 ‘고백적 글쓰기’를 촉발한다. 『골든아워』(흐름출판), 『검사 내전』(부키), 『개인주의자 선언』(문학동네), 『지독한 하루』(문학동네) 같은 일상에 대한 전문적 성찰을 담은 글들과,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민음사),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문학동네) 같은 독특한 체험과 감성을 담은 이야기는 여전히 책의 세계에서 자주 얼굴을 내밀 것이다.
정보경제 역시 운동을 가속화한다. 오늘날 진정한 ‘쩐의 전쟁’은 ‘부동산’이 아니라 ‘데이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중이다. ‘공유’라는 이름으로 출현 중인 빅 데이터 경제는 아날로그적 현실의 저항을 연신 일으키겠지만, 아무도 이 흐름 자체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플랫폼 레볼루션』(부키), 『머신 플랫폼 크라우드』(청림출판), 『유튜브 레볼루션』(더퀘스트)이 보여주듯, 데이터를 이용한 기업의 기묘한 마술이 독자의 거대한 흥미를 일으키는 건 자연스럽다.
동시에 『데이터사회 비판』(책읽는수요일), 『포스트프라이버시 경제』(사계절)에서처럼 데이터의 통제권을 향한 시민사회의 요구도 거세질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인간노동이 증발하는 세상에 대응해 인간-기계 협업 기술을 개발하도록 연구를 장려하고, 노동 유연화와 사회 안전망 구축을 맞바꾸는 새로운 노동현실의 창출을 향한 논의도 『노동 4.0』(쓰리체어스)에 이어질 게 틀림없다.
『정해진 미래』(북스톤)와 『수축사회』(메디치미디어)가 보고한 바대로, 한국 사회를 덮칠 인구절벽 등 쇠퇴의 충격은 기존 사회의 모든 규칙을 흔들어버릴 것이기에, 이를 대비하는 책들도 쏟아질 것이다.
한편, 우여곡절을 겪겠지만, 세계사의 전반적 중심이 유럽-아메리카 서구 공동체에서 아시아-아라비아-유럽 중심의 유라시아 공동체로 옮겨오는 흐름은 현재로선 불가역적이다. 달러와 석유를 연동해 ‘세계의 제국’ 역할을 해온 미국이 ‘힘센 보통국가’를 지향하면서 무역전쟁까지 불사하는 ‘트럼프독트린’의 당혹스러운 등장이 이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지리는 곧 정치다. 현재 일어나는 세계사적 전환은 우리한테 ‘세계를 보는 지도’를 다시 그릴 것을 요구한다. 『유라시아 견문』(서해문집), 『유라시아 신화기행』(민음사), 『실크로드 세계사』(책과함께) 등이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서 새로운 책들을 낳을 것이다.
잡담과 정보를 뛰어넘어 지혜와 통찰이 필요한 이들에게 언어를 실어 나르는 출판의 임무는 올해도 멈추지 않는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들에 부응해 책들은 영원히 모험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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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조금 고쳐서 옮겨 둡니다.
책의 세계는 엄청나게 다양해서, 이렇게 몇 가지로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참고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