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책과 미래] 김수영과 함께 새해 첫 새벽을 보내다
한 해 첫 아침을 한자로 원단(元旦)이라 한다. 장인용의 『한자본색』(뿌리와이파리)을 읽다가 새삼 그 뜻을 깊게 새기게 되었다.
갑골문에서 원(元)은 사람(儿) 위에 이(二)가 올라앉은 모양인데, 이때의 이(二)는 상(上), 즉 ‘위’를 말한다. 따라서 원(元)은 사람 위로 하늘이 열리는 태초를 표상한다. 여기에서 ‘으뜸’ ‘처음’ 등의 의미가 생겼다. 단(旦)은 태양을 뜻하는 형상(日)을 땅을 뜻하는 네모(口)가 받치는 모양으로 갑골문에 나타난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우주관을 따른 것인데, 나중에 아래의 네모가 지평선 모양(一)으로 단순화됐다. ‘아침’ ‘해 뜰 녘’을 뜻한다.
새해 첫 아침은, ‘지구가 공전 궤도에서 또다시 새로운 주기운동을 시작하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다.
원단(元旦)은 한 해의 첫 번째 태양이 어제의 그 태양과 똑같지 못하게 하는 영혼의 실천이요, 묵은 시간을 태초의 시간으로 되돌리는 개벽의 선언이다. 시간의 축을 끊어 처음 해가 솟아오른 때처럼 살기로 하는 결단이고, 낡은 인간을 갈아엎고 새로운 인간을 선포하는 행위다.
돌아보고 살펴보고 내다보면서 한 해의 첫 주를 공손하고 경건하게 보내는 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할 뿐이다.
새해 첫날, 해 뜰 무렵, 홀로 앉아 시를 읽었다. 한 해의 언어가 단단하고 반듯하기를 바라면서 해마다 하는 기도 같은 것이다.
올해의 시는 김수영의 「65년의 새 해」. “그때 너는 한 살이었다/ 그때 너는 한 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로 시작하는 작품이다. 행을 반복해 리듬을 만들고, 1945년 태어남의 ‘기적’을 강조한다. 이후 연을 바꾸어 가면서 시는 여섯 살, 열여섯 살, 열일곱 살, 열아홉 살에 있었던 일들을 통해 독자의 피를 서서히 고양한다.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6.3항쟁(한일협상반대시위) 등이 있었던 해다. 안팎으로 모욕이 중첩되는 나날들 속에서, 시인은 “그때도 너는 기적이었다”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그렇다. 우리의 목숨은 항상 기적이었다.
그리고 스무 살, 자유로운 삶에 대한 사랑이 익어서 언어의 봇물이 터진다.
“너는 이제 스무 살이다/ 너는 이제 스무 살이다/ 너는 여전히 기적일 것이다/ 너의 사랑은 익어가기 시작한다/ (중략)/ 너는 너의 힘을 다해서 답쌔 버릴 것이다/ 너의 가난을 (중략)/ 이 엄청난 어려움을 고통을/ 이 몸을 찢는 부자유를”.
이것이 진짜 기적이다. 사랑의 실천이 가난, 어려움, 고통, 부자유를 한꺼번에 잡도리하는 일, 그로써 태초의 하늘이 다시 열리는 원단의 본뜻대로, 깜짝 놀랄 만한 ‘새 해’를 떠오르게 하는 일 말이다.
"네가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란다/ 네가 우리를 보고 깜짝 놀란다/ 65년의 새 얼굴을 보고/ 65년의 새 해를 보고"
깜짝 놀라고 싶다는 소망은 2019년에도 유효하다. 올해는 부디, 시인의 바람대로, 살아 있음이 기적이 되는 게 아니라, 꿈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