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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Dec 06. 2015

공분(公憤)하고 연대(solidarité)하라

93세의 레지스탕스가 던지는 울림

                                            


INDIGNEZ-VOUS !

외친다. 분노하라고.

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소책자에 가까운 이 글을 펴낼 때 스테판 에셀의 나이는 자그마치 94세.

도대체 그는 무엇에 대해 분노하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분노를 말하고 격분에 대해서 얘기한다. 궁극적으로는 평화적 봉기를 꺼내든다. 우리는 어째서 분노해야 하며 이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이는 혁명과 관련지어 생각해보아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전에는 혁명이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헌법은 모든 법 위의 법으로 군림한다. 이를 벗어난 개혁이 정상적 상황에서 이루어 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때문에 거의 모든 혁명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


프랑스 대혁명은 인류 역사에 남을 유산이지만 이를 이루기까지 민중이 흘린 피의 양은 가늠할 수도 없을 것이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역시 마찬가지다.20세기 중반으로 넘어와보자. 쿠바혁명에서도 얼마나 많은 혁명가들이 희생되었는지. 결국 체 게바라까지 볼리비아 혁명 과정에서 처형되었고 말이다. 최근 시점까지 오더라도 무바라크와 카다피를 끌어내린 이집트와 리비아에서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다. 혁명은 필연적으로 희생을 요구한다. 부정하기 힘들다. 시민들의 피는 혁명의 필요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우리가 평소 이해하고 있던 혁명과 사뭇 다르다. 그는 격분에서 오는 폭력 행위와 테러리즘등이 이해할 수는 있되, 그렇다고 그걸 지향해서는 아니 된다고 말한다.


아니, 그럼 어떻게 혁명을 이루란 말인가? 여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야 한다. 새로운 혁명을 말이다. 혁명은 근본적으로 구체제에서 신체제로의 전환을 위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돌이켜보자.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혁명들을. 결국 그 혁명들은 모두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이루어진 혁명이 아니던가?


민주주의는 인류가 여태까지 보유해왔던 체제 중에 가장 합리적인 체제이다. 최악의 체제들중 그나마 가장 나은 체제라는 찜찜한 수식도 붙는다. 물론 완벽한 제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현재로선 더 이상 나은 방안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최선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갖춰진 나라에선 적어도 폭력을 수반한 극단적인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어떤 면에서는 현대 사회가 안정화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직 전세계의 모든 국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자리잡고 있다. 기나긴 내전상태에 빠져 있는 아프리카의 나라들과, 북한과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들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이는 과거와 비슷한 방식의 혁명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왜나면 그들 국가들의 사회적 모습이 수십, 수백년전 이미 혁명이 일어났던 국가들과 비슷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혁명과 비슷한 형태를 띠는 무언가가 일어나겠지만 이는 우리의 주된 논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혁명은 어떤 혁명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날에도 혁명은 가능하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사르트르가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역사는 '폭력'을 통해 굴러간다고 말했지만, 더는 그런 폭력은 없다. 적어도 민주화가 완성된 국가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새 시대의 무력은,  가타리와 들뢰즈가 말했던 '분자혁명'과 같은 다른 개념의 폭력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현재 대학가에 남아있는 운동권 세력을 그다지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여전히 수십년 전의 담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서 혁명이라니. 그것도 민중해방이니, 민족해방이니.. 도대체 언제적 NL, PD인가. 문제는 그 혁명이 볼셰비키 혁명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데 있다. 말그대로 요즘 세상에서 그건 불가능하다. 그들이 진정으로 혁명을 원한다면 21세기의 세계가 요구하는 어법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스테판 에셀이 원하는 평화적 봉기는 그러한 혁명과 한참 떨어져 있다. 다시금 말하겠다. 현대 사회에서도 혁명은 가능하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혁명은 가능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대신 이전의 시민정신을 계승해서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전개하는 운동이 될 것이다. 폭력이 없어도 된다. 이전에는 민초의 뜻을 나타내려면 폭력과 같은 극단적 방법밖에는 없었다.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인터넷이라는 망을 통해서 전세계는 연결되어 있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은 현대 사회에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혁명들의 시초로, 기념비적 사건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무바라크와 카다피를 끌어내린 것도 이에서 나왔고 말이다. 사실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다. 10여년전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의 촛불시위도 하나의 혁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첨언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촛불은 시민들의 ‘공분’ 속에서 등장해왔다. 2002년의 효순-미선 사건, 2004년의 대통령 탄핵 사건, 2008년의 한미 FTA 및 미국산 소고기 수입, 2009년의 용산참사, 2013년의 철도 민영화 등 대한민국을 뒤흔든 사건마다 말이다. 물론 저 사건들에서 들린 촛불중에는 다소 경솔했고, 신중치 못했으며, 정제되지 못한 생각이 앞선 촛불들도 있다. 끓는 피를 참지 못해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운 촛불들이 있다는 것도 존재한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시민들의 '공분'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공동체주의를 찾아보기 힘들어지는 이 시대에 solidarité(연대) 를 말하고 있기에. 그리고 그 가치를 증명해 내기에.


말하고 싶다. “창조가 저항이고, 저항이 곧 창조다”라는 스테판 에셀의 말을 빌려서.

비판에 꼭 대안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앞뒤 가리지 않고 분노하는 시민들이 있다면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혁명은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다소 투박할 순 있어도 그 방향성은 분명 옳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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