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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Dec 06. 2015

프레이밍, 이시대의 정치학

언어는 곧 힘이다


세이버매트릭스가 현장에까지 침투한 현대 야구에서 새로이 각광받고 있는 툴(tool)로 '프레이밍(framing)'이 있다. 대단한 개념은 아니고 우리가 흔히 '미트질'이라 부르는 기술ㅡ 스트라익 존에 걸치는 볼을 스트라익 카운트를 받게끔 포수가 이동시키는 것 ㅡ 을 세련되게 개념화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통계학과 세이버매트릭스로 무장한 MLB 프런트 일선에서는 몇 년 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프레이밍에 능한 포수는 한 시즌에 50점 이상을 막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치를 들어 자세히 설명하면 이에 대해서만 글 하나를 통째로 써야 하므로 생략하겠다. 밀워키의 조너던 루크로이나 세인트루이스의 야디에르 몰리나 같은 명포수가 좋은 예이다. 탬파베이 같은 팀은 아예 프레이밍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큰 효과를 보았다. 패스트볼 위주의 피칭을 하는, 제구의 영점이 미처 잡히지 않은 영건들을 줄줄이 빅리그에 연착륙시킨 것이다.





이쯤되면 '프레이밍'을 단순한 눈속임 기술 정도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단순한 눈속임으로는 시즌 내내 장기적인 효과를 볼 수 없다. 프레이밍은 치밀하게 계산된 기술이며, 변수變數가 아니라 상수常數이다. 게다가 그렇게 제껴두면 승부에서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고.


그리고, 이는 다른 분야인 '정치권'에도 적용될 수 있다. 프레이밍 말이다.





정치권에서도 프레이밍은 각광받고 있는 패러다임이다. 여기서는 프레임을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치적 구조물> 정도로 정의해 둘 수 있겠다. 메이저리그의 프레이밍을 예로 들어 글을 시작했지만 사실 역사를 따진다면 이쪽이 훨씬 먼저이다. 최근에 들어서야 비로소 대중들에게 인지되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오랜 기간동안 이 프레이밍은 <보수 세력>에 의해 전유專有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그들ㅡ보수 세력ㅡ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자신들의 가치를 응축한 프레임을 짜고, 이를 환기시키는 구절과 단어를 미디어에 반복적으로 노출시킨다. 그렇게 쟁점을 정의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사회 정책과 제도가 형성된다. 무슨 말이냐고? 우리나라의 경우를 통해 좀더 직관적으로 생각해보자



.



대한민국 진보 정치의 역사에서 <승리>라는 단어는 단 두번만 등장한다.


그런데 그 찰나의 승리조차도 진보세력의 자체적 역량으로 굴삭해낸 성취라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어쩌면 걸출한 두명의 정치인의 개인적인 저력에 의존해 <기적>같은 승리를 연이어 거두었다 보는 것이 더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그리고 기적에 의해 만들어 낸 달콤한 10년 동안에도 진보진영은 국회의 다수당 자리 한번 제대로 차지해 본 역사가 없다.


그럴 수밖에. 그들에게는 변변찮은 프레임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정치철학 류의 대단히 고상한 가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저쪽 진영에도 마찬가지로 결여되어 있는 것이니까.


민주당에게 <반독재 민주화 투쟁사> 외에 내세울 만한 , 그럴듯하게 구축된 프레이밍이 존재한 '적'이 있는가?


자신들을 '진보'라고 칭하는 이 나라의 정치세력은 그동안 지독한 착각과 오만에 빠져 있었다.


시민들이 '민주화'라는 업적을 자신들과 동일시 할 것이란 착각.

따라서 자신들을 '정의'의 세력으로 보고 표를 당연히 줄 것이라는 착각.

그리고 '계급투표' 대신 자신의 이익에 반反하는 세력에게 표를 던지는 이들을 '무식하다'고 규정짓는

오만에 말이다.


그러는 동안 보수세력과 언론은 위력적인 프레임을 짜내고 있었는데!



조중동이라고 묶이곤 하는 보수언론을 욕하기 이전에 그들의 소름끼칠만큼 놀라운 프레임 창출 능력을 보아야 한다. 그들은 평범한 초등학교 6학년짜리의 입에서 "종합부동산세 인간적으로 말도 안 되는 세금폭탄이야"라는 말이 나오게 만든다. 그 친구는 10년 후,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언어의, 거짓말같은 마력이다.




<작은 정부, 신자유주의, 규제철폐, 부의 극한 >같은 가치들을 종횡으로 엮어 하나의 축을 형성하고 틀을

짜낸다. 그리고 그 틀에 맞는 개념과 언어를 생산한다. 사실 '경제민주화'와 '무상급식'은 좌파들이 먼저 끌고 왔어야 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그 의제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재단해서 가져온 것은 우파 정치인들이었다. '세금폭탄'이라는 워딩을 생각해보자. 폭탄이라는 단어는 세금 자체가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것이라는 뉘앙스를 심어준다. 이에 실제로는 사회를 정상적으로 기능케 하는 세금의 긍정적 기능은 잠시 망각하게 된다. 무상급식에는 '공짜'라는 단어가 붙어 다닌다. 공짜라는 단어의 어감은 결코 좋지만은 않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과한 것을 바라는 느낌이 나고, 왠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격언이 떠오른다. 그리고 무상급식은 뭔가 불합리하게 거저 먹으려 하는 제도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설마 그렇게까지 계산되었을라고? 그 설마가 사람 잡는다.


개념을 조작하고 프로파간다를 통해 진보의 승리를 가져오자는 것이 아니다.


진보는 자신들의 '신념'을 프레임을 사용해 전달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과거의 영웅들과 민주화라는 유산을 끝없이 미화하는 것으로는 더이상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2012년 대선이 끝나고 윤여준씨가 했던 말이다.


"진보는 악마에게 진 것이 아니다".


더이상 상대 세력을 불의不義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자신을 냉정히 인식하지 못한다면 희망이 없다.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다. 유권자 다수에게 호소력을 가지는 정책을 개발하고 이를 설득하기 위해, <프레임>을 짜야 한다.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으며, 담론으로 수용될 만한 진보진영의 새로운 프레임의 탄생. 이것만이 대한민국이라는 새의 양 날개의 균형을 맞춰줄 것이다.





* 주요 레퍼런스 :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조지 레이코프,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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