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tincelle Dec 07. 2015

'남성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스트 남성'

동기의 순수성에 더하여


'남성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스트 남성'. 문장을 이렇게 고쳐보면 어떨까. '남성'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스트인' 남성.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해진다. 우리끼리 다음과 같이 정의해보자. 전자는 페미니즘을 '타자他者적'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그룹이고,  후자는 페미니즘을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인본주의적 사상으로 느끼는 이들이라고.  아마 후자가 좀더 바람직한 쪽일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둘 사이에 우열관계라는게 과연 존재할까?




다음의 링크를 타고 들어가보자.  본인을 '평화학 연구자'라고 말하는, 여성주의 연구자 정희진씨의 글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18409.html


해당 칼럼에서 발췌한 대목이다.


우리 사회에는 두 가지 타입의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있는 것 같다. 이들 중 대부분은 성별 제도를 구조적인 억압으로 인식하고 일상에서 여성주의를 실천한다. 예를 들어 군대의 남성성에 반대하기 때문에 병역을 거부하는 남성, 결혼 제도가 국가의 복지 정책을 대신하고 있다며 비혼을 고수하는 남성, 시간 배분과 순서에서 가사노동에 최우선 가치를 부여하는 남성, ‘작은’ 실천이지만 집에서 앉아서 소변을 보는 남성도 있다.또 다른 이들은 여성주의를 진보나 정치적 올바름의 한 종류로 보고 자신을 “남성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다. 심한 경우, 자기보다 페미니즘 지식이 없는 여성을 무시하고 자신과 경쟁관계에 있는 남성을 비판하기 위해 여성주의 ‘완장’을 이용한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페미니스트 여성과 연애하기 위해 여성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최악은 ‘불성실한 루저’인 자신을 남성 페미니스트로 포장하는 경우다. 이들은 ‘빈대’를 연대라고 주장하면서, 가부장제 연애 시장의 ‘틈새’를 파고든다. 고학력 중산층 페미니스트에게 접근해 자신을 “남성다움을 포기한 올바른 인간”으로 고해하고 상대방의 자원(돈, 지식, 섹스, 보살핌…)을 착취한다. 분업(‘양다리’)을 하는 남성도 심심찮다. 돈과 지식은 페미니스트에게서, 진짜 연애는 ‘일반 여성’과 한다.


                                                           ...(중략)...


하지만 나는 이들이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에 관심이 없다. 여성주의와 자신의 관계 맺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모든 앎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과 인식자의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리해보자. 두가지 타입의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일단 받아들인다.


1) 일상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남성. (성계급의 구조적 억압성을 인정하며)

2) 정치, 사상의 차원에서 페미니즘을 인식하고, 자신을 '남성 페미니스트'라 지칭하는 남성.


서문에서 나눈 구분과 약간 다르긴 하지만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1)은 '페미니스트인 남성'으로. 2)는 '남성 페미니스트'로.


2)는 1)에 이미 속해있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 남성'의 부분집합이다. 1)의 '페미니스트인 남성'이 분명 더 큰 개념이다.  그들은 젠더가 계급으로 기능하고, 이것이 사회에서 구조적 억압을 만들어 내는 기제라는 것을 이미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여성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2)의 남성들, 자신들을 '페미니스트' 대신 '남성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하는 이들에게는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들은 1)의 남성들과 달리 '진정한' 페미니즘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장애물같은 존재란 말인가?




아니다. 그 자체로 의의를 지닌다. 비록 기원이 다르더라도, 여성주의가 뿌리 내리기엔 너무나 척박한 이 나라의 토양에선 충분히 뜻깊은 페미니즘이다.


정희진은 남성페미니스트들의 '연원淵源'에 궁금증을 보인다. 그는 학자다. 학문적 호기심은 당연하다. 때문에 이를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학문으로서의 페미니즘의 경계 밖에서도 이러한 구분이 의미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굳이 그렇게 구분을 해야 한단 말인가?  한국에는 '페미니스트'라는 직함을 달고 기고할만치 영향력이 있는 페미니스트들이 많지 않다. 우리가 자신있게 이름을 댈 수 있는 페미니스트가 몇 없지 않은가. 정희진이 지닌 입지를 고려할 때, 이런 식의 분석은 약간 위험하다. 대중들에게 다소 편협한 시각의 페미니즘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모양이 될 수 있다.  



<페미니즘: 주변에서 중심으로>, 벨 훅스

벨 훅스의 <페미니즘: 주변에서 중심으로>는 페미니즘 입문서로 좋은 책이다. 내용은 알차다. 배울 점도 많고. 모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정희진의 그것과 비슷한 구분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가 흑인이어서 그랬을까. 유독 백인 여성들의 페미니즘을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과 구분지으면서 비판하는 대목이 많다.  주류 백인 여성학자들이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이용되는 페미니즘이 그 대상이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가 된다. IVY리그를 위시한 동부 명문 대학을 나온, 중산층 이상의 백인 여성이라면 굳이 페미니즘을 그런식으로 이용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기득권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구사하는 페미니즘이 나쁘다고 단정지을 이유가 되지 못한다. 벨 훅스의 페미니즘은 보다 넓은 범위의 여성들을 구원할 수 있는 개념일 것이다. 그렇지만 포괄하는 범위가 좁다는 이유로, 기득권의 논리라는 이유로 그가 비판하는 페미니즘이 '쉐미니즘'으로 호도되어서는 아니 된다.  이러한 배제는 젠더라는 억압의 족쇄를 떼네고 만인의 평등이라는 기치를 내세우는 페미니즘의 개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순이기에.



정희진이 지적하는 '남성 페미니스트'로 돌아가보자. 페미니즘을 정치,사상적 차원에서 인지하고 타자적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남성 페미니스트'가 가장 높은 수준의 페미니스트는 아닐 것이다. 칼럼에서 지적하는 문제들(페미니스트 여성에게 기생, 이용)이 아예 없다고 우길 수도 없다. 그럼에도 많은 남성들에게 '남성 페미니스트'는 보다 정의로운 개념인 '페미니스트인 남성'에 이르기 전의 통과단계이다.


냉정하게 따져보자. 젠더를 초월해 여성주의에 완전히 자기이입을 '처음부터' 할 수 있는 '남성'이 몇이나 될 것인가. 뿌듯할 것이다. 자기가 이렇게 열려 있고 깨어 있는 사람이란 점에 말이다. 우리가 아프리카 난민들에게 ARS로 1000원 남짓을 후원하고 뿌듯함을 느끼듯이, 부자가 빈자에게 몇푼을 적선해주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고 착각하듯이, '남성 페미니스트'들도 그런 도덕적 성취감을 느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느끼게 된다. 페미니스트 앞에 붙는 '남성'이라는 수식어가 이미 큰 권력임을. 다른 모든 것을 초월할만치 강력한 힘을 가졌음을. 그 앞에 붙일 수 있는 수식어 자체가 젠더 사이의 위계를 명명백백히 입증함을. 인식이 여기까지 왔다면 자연스레 다음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자신을 그냥,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하는 단계로 말이다.



동기가 순수하면 좋다. 순수하지 않은 동기보다는 물론 좋을 것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아닌가. 그렇지만 동기가 선하지 못하다 해서 결과가 폄하당해서는 아니 된다. 좋은 의도로 시작해서 나쁜 결과로 귀결되는 것보다는, 순수하지 않은 의도였을지라도 좋은 결과를 낳는 쪽이 백배 천배 낫다.


이제는 많이들 아는 사실이지만, 링컨은 '노예해방론자'는 아니었다. 노예해방은 미국 내전 (Civil War)에서 유리한 국면을 창출해 내기 위한 정치적 카드였다. 노예제를 유지함으로써 미국의 분열을 막을 수 있었다면, 링컨은 분명 노예제를 옹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에 의해 노예제는 폐지되었다. 그리고 그의 업적은 길이길이 칭송받고 있다. 의도에 관계없이 선한 결과만으로 평가받는 좋은 예이다.


하물며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어떻겠는가. 그들은 페미니즘이 옳은 사상임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비록 온전한 형태로 그것을 받아들이진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이익만으로 노예제의 존폐를 재단한 링컨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이 아닌가. 설령 '짝짓기'의 수단으로 페미니즘을 골랐다 해도 그들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이 페미니즘이 옳다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면 말이다. 적어도 그들은, '짝짓기'만을 위해 여성들 앞에서 온갖 사탕발림과 개수작을 일삼는 수컷들과는 결이 다른 인간이다.



'페미니스트'라고 자칭하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사회를 꿈꾼다. 이것이 '나는 인종평등주의자'라고 외치는 것만큼 당연해지는 세상을 바란다. 모든 거추장스러운 수식어가 사라질 날을 그린다.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지칭은 종국에는 우스꽝스러운 구분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연대를 느끼고 박수를 보낸다.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방향을 걷고 있기에.


하나의 사상을 이행하는 데는 여러 단계가 있다. 그 과도기적 단계를 우리네 중 누군가는 열심히 밟아나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레이밍, 이시대의 정치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