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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Jan 14. 2016

메갈리아에 대한 돌팔매질을 멈춰라

기울어진 판이 당연해진 이들에게




손가락이 가르키는 바는 '=', equality일까



메갈리아. '여혐' 기조가 본격적으로 떠오른 작년 한해를 뜨겁게 달군 커뮤니티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메갈리아의 작태는 저급한 소아병적 대응이라고. 분명 그들의 행동은 정상적 범주에서 이해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사실,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남성이 있는지가 회의적이다.


'한남충'이라는 조롱은 불쾌하다. 당연하다. 그렇지만 한 번만 이들에게 감정이입을 해보자.







메갈리아에 대해 공론화된 여론은 비판보다 차라리 비난에 가깝다. 요즘 유행하는 '  빼애애애액-! '으로 표현하면 얼추 비슷하려나.  난생처음으로 겪어본 가열찬 모욕에 우리는 정신이 얼얼해졌나 보다. 사실, 상상도 해보지 못한 존재의 출현이다. '좇나' 대신 '봊나'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커뮤니티의 탄생이라니.







'미러링' (이미지 출처: http://www.successful-blog.com)



우리는 말한다. 이런 비이성은 사태의 본질을 흐릴 뿐이라고. 미러링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그들이 답한다.  '여성험오'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라고?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그렇게 해왔다고. 그리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고. 애당초 혐오는 이성도, 논리도 아니다. '된장녀'라는 신조어로 시작된 사회적 매장은 결국 일베라는 괴물을 낳았다. 어차피 바뀌지 않을 것이라면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다. 왜 너희만 혐오해? 우리도 혐오할 권리가 있어. 대신, 너희와 달리 우리는 혐오에 무언가를 더해 보여주겠어.










그들의 외침에서 거리낌을 느꼈다. 그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남성 집단에 대한 거리낌을. 누군가 나에게 '한남충'의 프레임에서 항상 자유로웠냐 묻는다면, 나는 떳떳할 수 없다. 철없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뱉었던 말들이 부끄러워서. 어렸기 때문이라고 감싸 안을 수 없는 그 치기와 설익음을 다시 떠올리기 힘들어서.



때문에 적과 똑같이 굴면 그 수준으로 전락한다는 말은, 도덕적 허영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메갈리아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메르스 갤러리에서 일어난 소동부터? 아니면 된장녀 및 김치녀로 인터넷이 뜨겁게 달궈질 무렵?. 단 하나로 이유를 좁힐 순 없을 것 같다. 광범위하게 형성된 여성 혐오의 추적은 비교적 간단하다. 하지만 혐오 위에 굳건한 '차별'의 문제까지 올라가면 계보학(genealogy) 같은 무거운 도구를 들고 와야 할 것이다.


메갈리아는 혐오와 차별 모두에 대항하기 위한 사이트이다. 적어도 그들은 그것을 기치로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두 마리 토끼를 같이 잡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다. 수년전부터 넷과 미디어에서 시작된 근거 없는 매도는 혐오 기제를 낳았다. 우글우글 뭉쳐서 '다굴'을 놓는 분위기에서는 그에 편승해 신나게 즐길 수 있다. 평소에는 자갈돌만 던져도 뒷감당에 떨었을 것이, 무리에 속했을 때는 바윗돌도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문제는, 자신들이 던지고 있는 돌멩이가 무얼 뜻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라는 사실이다. 집단적 혐오가 일종의 사회적 이지메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친다. 빼 애 애액. 모르고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는데.



셜리 잭슨, <제비뽑기 The Lottery>




셜리 잭슨의 <The Lottery (제비뽑기)>는 섬찟한 단편소설이다. 어느 작은 마을에서 매년  한 번씩 제비뽑기를 한다. 예외는 없다. 강제된 참여다. 누군가는 뽑혀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뽑히면, 죽는다. 나머지 사람들이 던진 돌 무더기에 깔려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신에게 제물로 바쳐지던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처럼 그들은 결백하다. 잘못이라고는 종이를 잘못 뽑은 죄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어처구니없는 비련의 주인공에게 거리낌 없이 돌을 던진다. 일단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던지니까. 그게 당연한 것이다.





'루저녀' 이도경을 모두들 기억할 것이다. 연예인도 아닌 반고정 패널에 불과한 일반인. 그 이름은 6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머리에 박혀있다. 잊히고 싶겠지만, 잔인한 대중들은 그녀를 놓아줄 기미가 없다. 아직까지도 심심찮게 근황이 업데이트되어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다. 마녀사냥이다. "180cm가 안 되는 남자는 루저"라는 한마디가 그녀의 인생을 뒤엎을 만큼 대단한 죄였을까. 나는 그냥 운이 지독히도 나빴다고 생각한다. 제비를 뽑아 돌 무더기에 깔린 가련한 여성은 분명 운이 좋지 않았다. 수백 명 중에 하필 자기가 '그' 한 명이었으니까. 이도경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폭탄 돌리기였다. 누군가는 당첨될 운명이었다. 현실에 옮겨진 된장녀와 김치녀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시뮬라크르로, 누군가는 나타났어야 했다. 첫 데이트에서 포인트 적립카드를 내미는 남자는 별로라는 말을 했다가 뭇매를 맞았던 배우 김옥빈도 마찬가지다.










서두에 혐오는 논리가 아니라 말했다. 그런 맥락에서,  여성 혐오는 페미니즘의 독선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성적 대척점은 내가 아는 선에서는 이 사회에 없다. 故성재기류의 저급한 남성주의를 들이댈 생각은 말아라. 한 우월주의자의 궤변은 사상의 영역에는 손끝 하나 미치지 못했으니까. 그보다는 '욕망'의 차원에서 분석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다. 소유하고 싶은데, 자기들이랑 안 만나 주니까. 소유당해 주지 않으니까. 그래서 아예 역으로 혐오를 선택했다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 있지 않은가. 구애가 스토킹이 되고, 스토킹이 폭력으로 발전하고. 실현되지 못한 욕망이 어그러지는 과정과 일치한다.





메갈리아가 지나치게 날을 세우고 있다고들 말한다. 난 잘 모르겠다. 그 정도로 벼려진 날도 없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건지 궁금해서 말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60년대의 흑인 인권 운동가 말콤 엑스(Malcom X). 그의 날은 살벌하게 서 있었다.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흑백 분리주의를 주장하던 그가 과격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간 억압당해 온 흑인들의 분노를 대변하는 말콤 엑스의 논변은, 어찌 보면 '흑인 KKK'단이라보는 편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메갈리아에서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글과 이미지보다 훨씬 수위가 높았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 말콤 엑스가 없었으면 흑인 인권운동의 흐름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나는 그 혐오의 극단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자리했으리라 생각한다. 간단한 이치다. 극단이 사라지면 중립론자도 극단으로 보이고, 그렇게 몰린다. 때문에 극단의 존재가 혐오의 원인이라 실드 치는 '한남충'들의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선후관계부터  틀렸을뿐더러 (여성혐오의 극단이 메갈리아를 낳은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 그렇게 치면 이 시대의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정치적 사형을 당해야 할 것이다. 냉전시대에는 온건했을 그들의 이념이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시대에는 왼쪽 극단으로 옮겨왔으니까 말이다. 극단은 어디까지나 상대적 개념이란 이야기다.



말콤 엑스, 그는 단순한 과격분자였을까






군 가산점 제도는 여성 혐오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이슈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는 고도로 정치적인 프레이밍이다. 많은 남성들은 군 가산점 제도가 군복무도 안 하고, 자신밖에 모르며,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여성들이 , 깽판을 쳤기에 폐지됐다 생각한다. 실상은 어땠는가. 공무원 시험에서 만점을 받고도 떨어진 여성이 헌법소원을 내서 위헌 판결이 나지 않았는가.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노력으로 메꿀 수 없는 차이를 부여하던 군 가산점 제도는 헌법의 근본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정책이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격이었달까. 본질을 호도하는 당근이었을 뿐이다.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다. 남성 집단 대부분에 해당되는 병역의무에 대한 보상을, 어째서 겨우 몇몇만 혜택 볼 공무원 시험의 가산점으로 퉁친단 말인가. 이는 1962년의 오히라-김종필 회담에서 식민지배 36년간 수탈당한 선조들의 핏값을 차관으로 갈무리 지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왜 A에 대한 보상을 '가'로 해치우려 하는가. 이런 썩은 당근을 덥석 물어선 안된다. 그사이에 정부는 국방비에서 단 '2%'만을 인건비로 지급하며 60만 국군장병을 조용히, 잘 써먹었다. 남성과 여성이 피 터지게 싸우는 사이에.


의도된 갈등이다. 이런 의도된 갈등에 잠식되면  안 된다. 위에서 던져준, 그들이 설계한 범위 밖으로 끌고 나와야 한다. 메갈리아가 촉발한 갈등에 대해 말들이 많다. 사회 분위기를 해친다고들 말한다. 이런 갈등이 무의미하다고도 한다. 그렇게 흔히들 갈등은 나쁜 것이라 생각한다. 글쎄, 동의할 수 없는데 말이다. 갈등의 증폭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조화만으로 사회를 끌고 가겠는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도 말하지 않았는가. 갈등이야말로 사회 발전의 원천이라고. 메갈리아가 만들어낸 갈등의 양상은 그래도 강요된 침묵보다는 훨씬 솔직하고 생산적이다.






메갈리아를 넌덜머리 나는 골칫덩이로 치부하는 우리의 입장은,  남성이기에 견지할 수 있는 입장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중립지대에 서있음은 굉장히 무서운 출발점이다. 중립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저울의 중간에 서서. 자신이 굉장히 합리적이고 공정한 입장을 견지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메갈리아가, 일베 같은 수준의 저급한 혐오 집단일까. 아니다. 그러려면 일베처럼 강간모의가 있고. 소라넷처럼 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하며. 남성을 향한 혐오범죄와 폭력이 실재해야 할 것이다. 현실에서 메갈리안들이 저지르는 행동은 고작 화장실에 가서 포스트잇을 붙이고 나올 뿐인 것을. 메갈리아의 행태는 여성에게 허용되는 공격성의 폭이 굉장히 좁기 때문에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다. 우리 남성들이 입에 상스런 욕을 달고 다녀도 뭐라 하는 사람,  별로 없다. 그렇지만 같은 말이 여자들 입에서 튀어나오면 따가운 눈총이 따라온다. 물론 메갈리아에는 정도를 넘어선 과격분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철저히 성적 존엄성을 무시하는 발언은 당연히 지탄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말이다. 은근하게 한쪽 성별을 무시하는 발언이 얼마나 만연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고 있었는지. 이를 먼저 생각해 보자.






영문 설명대로 부처 이름을 만들지 그러셨어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여성부'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한국이 성평등 사회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아직 그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도, 제대로 된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동의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여성부는 '여성가족부'라는 이름의 기관이다. 그런데, 여성과 가족은 애당초 상충되는 개념이 아니다. 이 두 단어를 같이 엮는다는 것부터가 여성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어째서 여성은 곧 가족과 연결 지어져야 한단 말인가. '여성가족부'의 창립은 어쩌면,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는 격이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뚜렷한 차이를 인정하고 '여성부'를 만들었음 좋았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족부'를 독립시켜야 했다. 결국 이 또한 가족과 여성을 동치(同値)시키는 낡은 관념인 것이다.


여성가족부의 정책은 여성의 안위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며, 여성들이 만드는 정책 또한 아니다. 당연히, 여성들은 여성가족부의 '셧다운제'와 '아청법'같은 이해하기 힘든 정책에 지분이 없다. 책임질 필요도 없다. 여성가족부에 가해지는 조롱이 여성 전체에 대한 멸시로 환원되는 것도 참을 필요가 없다.







모르겠다, 나는. 그간 불법이 판을 칠 때는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 와서 준법의 잣대를 들이미는지. 그리고 무슨 낯짝으로 돌팔매질을 하는 지, 정말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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