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오대산인가, 지리산인가.
할머니의 공백을 메우려는 신참 요리사들의 새로운 요리개발이 이어지는 가운데, 다시 최고 요리사의 음식에 대해 알아보자. 이를 통해, 우리 집 최고 요리사가 되려면 이 정도의 각오가 필요하다는 가이드를 얻을 수도 있다. 바로, 비빔밥이다. 밥도둑이 어찌 게장만 있을까, 비빔밥도 어릴 적 내 밥도둑이었다. 비빔밥은 비벼 먹는 그릇의 크기가 매우 중요했는데, 밥그릇의 3-4배는 되는 사발이 필요했다. 더 작으면 갖은 재료들은 넣고 비비기에 불편했고, 그릇이 양푼그릇처럼 큰 날에는 재료도 밥도 계속 추가하게 되어, 비비다 보면 양푼그릇의 크기만큼 가득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맛이 좋다 보니 그 많은 양을 남기지 않고 술술 다 먹게 되는 것이다.
할머니의 비빔밥은 맛도 좋았지만 색감이 아주 화려한 요리였다. 먼저, 들어가는 나물의 종류가 많았다. 뜨거운 밥에 준비된 나물들을 하나 둘 올려주는 데, 하나하나 다 맛있다. 초록색 시금치, 연두색 애호박, 주황색 당근, 희끄무레한 느타리, 갈색 고사리, 노란 대가리 콩나물, 다진 돼지고기가 기본이었고 그때 그때 조금씩 추가되거나 변경되고는 했다. 이 나물들 위로도 3-4가지 재료가 올라가는 데, 고추장과 계란이 먼저 위치를 선점했다. 뜨신 밥 위에 나물들, 그리고 그 위에 계란이불을 깔고 고추장을 한 숟갈 얹는다. 고추장이 또 별미였는 데, 장독대에서 바로 퍼와서 영롱한 붉은빛에 특별한 찰기를 자랑했다. 그리고 제일 상층부에는 김가루와 참기름이 올라가는데, 이것이 비빔밥의 마무리이다. 김 몇 장을 비벼서 눈처럼 내리게 한 후, 참기름까지 두르면 양손이 출격할 준비가 끝나는 것이었다. 비빔밥의 고향 전주시에서도 놀랄만했다.
당시에는 나물들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지 몰랐다. 알맞은 식감을 내기 위해 데치는 시간을 맞추는 것도 까다로웠다. 한번은 나물반찬을 한 번 만들기 위해 나물을 하나하나 다듬으면서 날아가는 시곗바늘을 보고 있자니, 할머니의 비빔밥은 만들지 못할 거란 것을 직감했다. 이렇게나 정성 들인 음식들을, 생산성으로 따지자면 고비용, 만들기에는 저효율인 요리들을 할머니는 끼니마다 차려주셨다.
나는 비빔밥에 완숙보다 살짝 반숙인 계란이 올라가는 것을 좋아했다. 나물들과 고추장을 열심히 비빈 후, 따뜻한 계란 노른자가 나물들 사이사이로 스며들면서 매콤함을 살짝 중화시켰다. 그렇게 버무려진 한 숟갈을 떠먹으면 찰진 식감에 순서대로 치고 들어오는 다채로운 나물 맛이 싱그러움을 가득 전해 주었다.
가끔 그 풍성한 비빔밥이 생각난다. 하굣길 손자를 기다리며 할머니 손길이 얼마나 바빴을까. 오늘은 반찬 집에 들러서 삼색나물을 사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