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이 남긴 여운에 대하여
나는 라떼에 올라간 우유거품을 좋아한다. 거품이 더 많고 진할수록 말이다. 그래서 항상 커피를 마시기 전에 우유거품 먼저 다 먹는다. 입을 요리조리 움직여서 거품을 거의 다 마시면, 가운데 남은 거품은 마시기가 힘들 때도 있는 데, 후~ 불어서 움직이던가 홉~ 하고 들이마셔서 마무리한다. 라떼 위의 우유거품은 커피의 향은 그대로 느끼면서도 달지 않은 솜사탕 같은 식감이 참으로 맘에 든다. 라떼의 쓴 맛에 도달하기 전에 고소한 맛으로 속을 따뜻하게 보호해 주는 것도 강한 카페인에 취약한 내게는 딱 좋은 방패막이다. 그러고 보니, 라떼 뿐만이 아니다. 고구마라떼에 올라가는 진득한 우유거품, 공차 초코밀크티의 치즈폼 등 각종 거품들을 좋아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거품이 주는 재미에 빠진 건 어릴 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 가족은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엄마는 조금이라도 드시면 어지러울 정도로 술이 몸에 안 받으시고, 아빠도 예전에는 드셨으나 금주하신 지 오래되었다. 나도 그다지 술을 즐기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어렸을 적에 할머니와 모종의 비밀스러운 교류가 있었다. 할머니는 가끔 맥주를 한 잔씩 드시고는 하셨다. 아마 저녁 식사자리에서 가족들이 다 같이 조금씩 먹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도 드셨던 것 같은데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때 어린아이였던 내게 어른들은 당연히 술을 주시지 않으셨다. 그런데, 내가 먹고 싶다고 했었는지 아니면 계속 할머니의 맥주잔을 신기하게 바라봐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시원한 맥주를 투명한 유리컵에 따르면 사이다 같은 소리가 나면서 기포가 올라오면 하얀 거품이 생기는 것이 신기했다. 할머니는 그 거품을 내게 내미셨고, 나는 할머니 옆에 앉아 매우 조심스럽게(맥주를 조금이라도 마실까봐 걱정하면서) 거품을 홀짝하고 받아먹었다.
아마 엄마가 술은 먹지 말라고 경고하셨을 것이기에 나는 맥주의 본체?를 먹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최대한 거품만 조금 먹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경험이 너무나 재밌었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내게 금지된 술을 약간 우회적인 방법으로 살짝 맛볼 수 있는 기회는 금단의 구역을 넘보는 스릴을 주었고, 무엇보다 맥주의 맨 위에 모자처럼 얹어져서 양도 얼마 안 되는 맥주거품을 먹는 것은 뭔가 제일 귀하고 맛있는 부분을 받는 것 같았다. 사실 거품은 먹자마자 입 안에서 금새 사라졌기 때문에 술 맛을 제대로 느끼기는 어려웠다. 할머니는 워낙에 손이 크고 쿨한 분이셨기에, '아이고~ 거품 조금 먹는 것은 괜찮아, 맛봐라~'하고 늘 흔쾌히 주셨다. 할머니는 멋쟁이셨고, 미식가였으며, 성격마저도 화통한 분이셨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거품만 보면 재밌고, 거품만 보면 먼저 먹게 된다. 내 손을 잡고 여러 가지 음식들을 맛보는 재미를 알려주신 할머니와 나만의 순간을 더 많이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