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 1위 장아찌를 찾아서
장아찌는 어느 식당에서나 흔히 등장하는 곁들임 반찬이지만, 중간중간 입맛을 돋우어주고 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 소박함과 단순한 모양새로 인해 주요리만큼 돋보이지는 않지만, 때로는 식탁을 이끌어 나가고 진두지휘하는 장아찌도 있다. 오늘은 간장게장만큼이나 밥도둑인 장아찌계의 슈퍼스타를 소개하려고 한다.
장아찌를 인터넷 백과사전에 찾아보니 채소를 소금이나 간장에 절여 숙성시킨 저장식품으로 나온다. 채소가 주재료가 되다 보니 종류도 다양하다. 생각나는 장아찌만 해도 마늘장아찌, 오이장아찌, 무장아찌, 고추장아찌, 명이나물장아찌 등이 있다. 장아찌라는 단어는 '장에 담근 지'라는 뜻으로 '지'는 김치를 가리킨다. 이런 절임 음식은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 데, 그 방법도 다양했다. 소금에 절이거나, 소금과 쌀밥을 섞어서 절인 것, 술지게미에 절이거나 장에 절인 것 등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고추와 젓갈 사용이 늘어나면서 채소절임류 중에서 김치류가 더욱 발달하게 되었고, 절임류와 김치류가 분화되었다고 하니 장아찌가 김치보다 선배님인 것이다.
이 구역 요리사께서 자신 있게 내미는 장아찌가 있었다. 할머니는 그 이름을 '나나스께'라고 부르셨다. 나중에 먹고 싶어서 찾아보다가 정확한 이름을 몰라서 시간이 좀 걸렸다. (할머니는 옛날 분이셔서 종종 일본어 단어를 쓰셨다.) 찾아보니, 정확한 명칭이 울외장아찌라고 한다. 울외는 크고 기다란 참외나 오이처럼 생겼다. 무기질, 비타민 등 영양소가 풍부해서 여름철, 땀을 많이 흘릴 때 좋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전북 군산, 정읍에서 주로 생산되는데, 삼국시대 부유층에서도 많이 담가먹었고 임금님 밥상에도 올랐다고 하니 장아찌라고 가볍게 볼 수 없는, 나름 역사가 깊은 고급 반찬이다.
울외장아찌는 향이 매우 특별하다. 소금이나 간장이 아닌 '주박'이라고 부르는 술을 빚은 뒤 남은 찌꺼기, 술지게미를 이용하여 절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울외장아찌를 구매한 후, 술지게미가 묻은 장아찌의 모습이 굉장히 생소했던 기억이 난다. 주박으로 인해서 숙성된 곡물의 깊은 향이 울외에 스며 들어서 씹을 때마다 입안에 깊은 향긋함이 퍼진다. 식감도 아주 좋은 데, 아삭하면서도 쫀득한, 입에 착 붙는 맛이 있다. 적당한 짭조름함에 뒷 맛도 깔끔하여 어느 음식에나 잘 어울린다. 그래서 손이 자꾸 간다.
할머니는 울외장아찌를 두 가지 방법으로 무쳐주셨다. 먼저, 장아찌를 먹을만한 크기로(손가락 두 마디만 한 길이에 얇기는 5~7mm 정도로 잘라주셨다.) 잘라서 물에 담가두어 짠맛을 뺀다. 그 후에 참기름과 참깨 등을 넣고 버무려서 먹는 기본에 충실한 방법이 하나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 참깨 등의 빨간 양념을 넣고 버무린 매콤한 버전이었는데, 그 재료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장아찌는 반짝이 옷을 입은 것처럼 빨갛고 맛깔스럽게 빛났다. 두 방법 다 별미였는 데, 사실 아무 양념을 안 하고 물에 담가두었다가 꼭 짜서 맨 밥에 먹기만 해도 충분히 맛있었다.
우리 가족은 여름휴가를 갈 때면 울외장아찌를 챙겨갔다. 혹시라도 입맛이 없거나 곁들여먹을 반찬이 마땅치 않을 때 요긴했기 때문이다. 누구 입맛에나 잘 맞아서 남녀노소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썰기만 하면 되니, 준비가 간단하고 국물이 없는 반찬이라서 챙겨가기도 편했다. 여행지에 가져가기에 딱 좋은 반찬이다. 그래서 이 울외장아찌를 볼 때마다 가족들과 차 타고 떠났던 휴가철이 생각난다. 또 다른 기억으로는 가족 중에 한 명이 아파서 수술을 받아야 했을 때가 있다. 병원이 멀리 있었던 탓에 가족들이 수술 전날에 찾아가 주변 숙소에서 잔 적이 있다. 그때, 늦은 저녁에 도착하여 마땅히 식사할 곳이 없었던 것 같다. 엄마는 배고픈 내게 쌀밥에 울외장아찌와 몇 가지 반찬을 내주셨다. 어린 나는 당시 어떤 상황인지 상세히 알 수 없었지만 아픈 가족의 모습을 본 후, 마음속으로는 걱정이 됐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우리는 조용히 밥을 먹으며 서로의 마음을 달랬던 것 같다. 그때 먹은 장아찌에는 다 잘 될 거라는 기도가 담겨있었다.
얼마 전, 잃어버린 그 맛이 새삼 기억나서 장아찌를 찾아 온라인으로 구매했다. 어설프지만 할머니의 흉내를 내어 반찬을 만들었다. 지금도 그 맛이 나서 너무 반가웠다. 그때처럼, 아삭하고 향긋했으며 입맛을 돋우어주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울외장아찌는 어느 반찬에나 잘 어울려서 자주 꺼내 먹게 되었다. 지금도 우리 집 냉장고에는 돌아온 슈퍼스타가 있다.
이 멋진 반찬에는 신나는 여름휴가도, 가슴 아픈 기억들도 들어가 있고,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버무려 따뜻하게 안아주는 할머니의 손길이 들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