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와 미숫가루

비밀스러운 전대 사용법

by 일상의빛

오늘은 할머니의 소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할머니는 두 개의 지갑을 사용하셨다. 하나는 손바닥 반만 한 작은 검은색 지갑인데, 얇은 가죽으로 만들어져서 지퍼로 여닫는 간단한 모양이다. 너무 작아서 지폐를 몇 번 접어서 넣어야 했고 동전도 몇 개 넣으면 겉으로 그 윤곽이 다 드러날 정도로 말랑말랑하고 얇은 지갑이었다. 할머니는 두 번째 지갑도 가지고 계셨는데, 그 지갑은 매우 비밀스러웠다. 먼저, 형태가 지갑의 모양이라기보다 긴 허리띠 같았다. 천으로 만들어져서 가운데 통로가 뻥 뚫려있었다. 그 구멍에 지폐를 넣고 허리에 두른 다음 띠의 양쪽 입구를 살짝 매듭지어주면 허리춤에 고정이 되고 몸 안 쪽으로 숨겨졌다. 그것을 전대라고 불렀는데, 할머니의 전대는 몸에서 떨어질 염려도 없었거니와 손주들에게 용돈을 주실 때도 옷감 안쪽 허리 깊숙한 곳에서 돈이 쏙~ 하고 나왔기 때문에 할머니를 마법사로 보이게 해 주었다.


이 전대는 웬만하면 몸에서 떨어질 일이 없었지만, 할머니는 전대를 또 다른 용도로 사용하셨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할머니가 머리가 아프실 때, 전대를 이마와 머리에 빙 둘러서 꽉 매고 계셨던 것을 본 적이 몇 번 있다. 그럴 때면, 이 전대의 모습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는 데, 주름지고 구깃구깃한 기다란 천조각이, 입구도 작아서 어떻게 지폐가 들어가는 건지 신기했다. 할머니께서 머리가 아프실 때는 실제 두통일 수도 있지만, 엄마와 다투고 나서 골이 아파서 머리를 싸매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싶다. 요즘 시대에는 머리가 아프다고 싸매고 드러눕는 경우를 잘 못 봤다. 어릴 적에만 해도 드라마에서 몇 번 봤던 것 같은데 말이다. 어디선가 찾아본 기억으로는 머리가 아플 때 무엇인가를 싸매면 관자놀이를 압박해서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했던 것 같다. 실제로는 어떤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머리에 뭔가를 싸매고 누우면 '나, 아프다. 나, 화났다. 나, 힘들다.'라고 말하지 않고 알리기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힘이 없거나 지칠 때, 먹었던 음식으로 미숫가루가 생각난다. 밥맛이 없을 때나 특히, 여름 무더위에 할머니는 미숫가루를 타 주셨다. 본격적으로 무엇을 먹기에는 목으로 넘어가지 않고, 몸 안에 열을 시원하게 내려줄 때 미숫가루 만한 게 없었다. 컵에 타주실 때도 있고 큰 사발에 타 주실 때도 있었다. 물에 미숫가루를 숭덩숭덩 가득 퍼넣고서는 슥슥 풀어서 숟가락으로 으깬다. 그러면 미숫가루의 고소한 향이 참기름을 압도할 정도로 진하게 퍼졌다. 잘 풀어진 미숫가루 위에 얼음을 몇 알 동동 띄워주시면 꿀떡꿀떡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조금 덜 풀어져서 뭉친 덩어리들도 살짝 씹어먹는 재미가 있었다. 나는 우유에 미숫가루를 타서 고소하게 만들어 먹기도 하는 데, 그때는 물에만 타 먹어도 고소하고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할머니는 원한다면 꿀을 조금씩 타주시기도 했는데, 그것도 별미였다. 할머니의 식탁은 내 작은 놀이터 같아서 맛도 있고 재미도 있고 배도 부르게 해주는 마법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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