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다 지치면

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

by 김인철


그런 생각을 한다. 공부방에서 악역은 과연 필요한 것일까? 학교든 공부방이든 성향이 다른 수십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자연히 악역을 맡는 선생이 생기게 된다. 근데 악역을 맡는 선생은 아이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다. 이곳에선 대부분 내가 그 역할을 맡는다. 보통 땐 별 생각이 없지만 몸이 힘들거나 심적으로 지칠 때쯤 거리를 두려 하는 아이들을 대할 때면 가끔 만감이 교차한다. 혹자는 그럼 악역을 맡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힐난할지 모르지만 현실은 늘 이상과 괴리가 있기 마련이지 않던가?


악역은 단지 소리를 버럭 지르거나 잔뜩 인상을 쓴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난감한 상황에서도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하고 최대한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객관의 척도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감정을 절제하는 것이다.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면 그것은 사랑을 빙자한 폭력일 가능성이 높다. 알고 있다고 해서 행동 또한 쉬운 것은 아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고민은 깊다. 하여 나는 이 공간에서 악역을 맡는 것이 영 마뜩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롭다.


하지만 이곳에서 악역을 맡을 순간은 자주 찾아온다. 그럴 때면 초등학교 시절 무척이나 엄했던 무서운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라 기분이 묘하다. 그 무섭고 엄했던 표정의 선생님도 지금의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꾸중이건 칭찬이건 기준은 있어야 한다. 칭찬의 강약 조절도 필요하다. 칭찬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 칭찬을 한다고 해서 고래가 무조건 춤을 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규정되어 버리는 것들은 선명하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때로는 유통기한이 필요하며 과감히 폐기 처분되어야 할 때도 있다. 비난을 해도 춤을 추는 고래는 미쳤거나 고래가 아닌 걸까?


이 작은 공간 안에서 긍정의 언어들은 상당히 많다. 새내기들이 들어온 후 긍정의 언어들은 더욱 많아졌다. 하지만 한번 분위기가 이상해져 버리면 그것들은 또 이곳에서 여간해선 되찾기 힘들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한동안 자연스럽다. 모두가 적응하며 잘 지내고 있는데 오직 나만이 적응을 못한 채 아득바득거린다. 아이들은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게다가 지금 나는 심적으로 몹시 흔들리고 있기에 혼란스러운 감정은 더욱 극대화된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 악역을 맡을 순간은 수시로 찾아온다. 핸드폰, 잡담, 수업시간에 뛰어다니기, 책상 위에 올라가서 쾅쾅거리기, 서슴없이 육두문자 날리기. 이런 상황에 처할 때를 대비해서 나는 야!라는 꽤나 부정적인 단말마 대신 얘들아!라는 친근한 말투로 갈아타기를 수도 없이 연습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되면 그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내 목소리는 어느 도로 위 급브레이크를 밟은 앙칼진 바퀴소리의 톤이 되어 버린다.

"선생님 왜 욕하면 안 돼요? 왜 핸드폰 가져가세요. 왜? 맨날 저만 혼내세요? 도대체 영어는 누가 만들었어요? 오늘은 국어 수업 안 하면 안 돼요? 왜요? 왜요? 왜요?"

장난 삼은 말투지만 얼마간은 진심 일터. 꼭 그래야만 하는가? 그냥 편하게 내버려 두면 나도 힘들지 않을 텐데. 그래 수업 시간이건 쉬는 시간이건 핸드폰 맘대로 쓰라지 뭐! 욕도 누구 앞에서건 마음대로 하라지 뭐! 여기서 안 한다고 저기서 안 할까. 건물 주인이 시끄럽다고 퉁퉁 거리며 내려와서 잘 보이지 않는 오른쪽 눈알을 부라려도 같이 눈 한번 흘겨주며 ‘됐고’를 외치면 될 터. 아, 이제 지겨운 꼰대 노릇은 그만 할까. 한없이 착한 순둥이 교사가 돼서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을 허락할까? 악역을 맡은 교사의 고뇌는 그렇게 이어진다.


고민은 하지만 고민하는 이유는 다르다. 입장이 다르므로 다를 수밖에 없다. 누군가 말했다. 기다릴 줄 아는 것. 그것이 진정한 힘이라고. 하지만 나는 기다림에 서툴다. 그것은 아직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것들은 명쾌하게 풀려야 한다. 그것이 나의 방식이다. 그의 말처럼 참아주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서 뭘? 어쩌라고. 지켜본다 하지만 지켜보다 끝나면. 있어준다 하지만 있어주다가 끝나버리면. 그럼 그게 정답일까. 혹여 그것은 상관하고 싶지 않은 무관심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기다리지 못하는, 나는 정말 이 시대의 마지막 '정말 어이없어'로 힐난받는 꼰대가 되고 마는가?


수화기를 들면 세 번의 울림 끝에 뚜우뚜우 반응은 냉담하다. 한 번 더 걸면 귀에 익은 여자 목소리가 전화기 주인의 부재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나는 상황을 호전시키려 전화를 기다린다. 기다리고 기다린다. 기다리다 지친다. 그가 옳고 내가 그를 수도 있다. 내가 옳고 그가 틀릴 수도 있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배워야 한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못 믿어서도 아니다. 무시를 당해서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기다림이다. 모든 것은 시간 속에 있으며 그 시간은 영원을 통과한다. 그리고 어느 시간에 있을 기다림으로 종착한다.


인성, 태도. 학업, 자존감. 이 모든 것들에 기준은 있지만 무엇 하나 정답이 될 수도 없다. 기다려 주는 것, 그 시간만이 가장 정답에 가까울 터. 내 안에서 시간은 영원을 동반하므로 바쁠 것이 없다. 그대 안에서도 시간은 영원을 동반하므로 그대 역시 서두를 것이 없다. 시간은 그 무수히 많은 얼굴 중에서 기다림을 찬양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기다림을 찬양한다. 언젠가는 올 것이기에 지켜보는 것으로도 행복하다. 그저 와주는 것으로도 행복하다. 서두는 것은 오직 그 외피의 나, 어떤 틀 속에 갇힌 우리들이다. 홍세화 선생이 그랬듯이 악역을 맡은 자는 그래서 슬프다. 기다리지 못하므로. 기다리다 지치므로. 마찬가지로 악역을 맡은 교사 또한 슬프다. 기다리는데 서툴므로. 기다리다 제풀에 지치므로. 악역을 맡은 교사는 요즘 기다리다 지쳤는지 일주일째 소화불량에 걸려있다.


2010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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