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진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읽고
올해부터 새로 일을 시작하고 마음이 바쁜 탓에 한동안 시집이나 소설을 일어볼 틈이 없었다. 아니 일은 핑계일뿐, 앞으로는 영원히 책이라는 것을 펼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소설 쓰기는 더더욱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아는 시인의 신간 소식을 접하고 시집을 한 권 샀다. 권상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노을 쪽에서 온 사람'을 읽는다. 권상진 시인은 전태일문학상 수상자 모임에서 두어 번 만난 적이 있다.
동료, 가족. 코로나는 시들해졌지만 단순했던 관계가 더 심플해진다. 노을 쪽에서 온사람. 시집 표제어가 인상적이다.
나무의자. 항상 인간에게 품을 내주는 나무의자도 다리를 꼬을 수 있다는 시인의 전복적인 상상이 신선하다. 매일 아침 출근 전 공원벤치에서 잠시 쉬다 가는 흔들의자가 다리를 꼬는 상상을 해본다.
시와 꽃을 좋아하는 지인이 그런 말을 했다. 정치, 경제, 과학은 인간의 삶을 위한 수단이고 시와 소설, 음악, 즉 예술은 삶의 목적이라고. 사람은 수단을 위해서 살지 말고 목적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그래서일까? 올해 새로 시작한 일터는 예전 일터에서만큼 열정이 솟지 않는다. 그때는 목적이었고 지금은 수단이라서일까.
화려하고 왁자한 시절은 더 이상 내 삶에 없을 것 같다. 이전의 나도 화려하진 않았지만, 종아리도, 팔뚝도 제법 굵었고 젊어는 보았으니. 삶은 갈수록 시들해지고 관계는 단순해지지만 시집 표제어처럼, 누군가에게 한번쯤 '노을 쪽에서 온 사람'이 되고 싶다. 석양을 등진채, 붉은 노을 쪽에서 오는 한 사람을 맞이하고 싶다.
두 개의 커다란 모니터, 무한으로 회전하는 동그라미, 그러니까 느려터진, 앞에서 각진 키보드만 두드리다가 간신히 시간을 쪼개어 사각사각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단조롭던 일상에서 삶의 목적을 조금은 찾아준 듯하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냐고? 아니 내 영혼이 불안하지 않다고. 그냥 그 정도 위안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