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병뚜껑 하나 정도는 거뜬히 딸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나는 누구인가? 무엇인가? 존재를 까맣게 잊고 살다가 가끔씩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었음을 일깨워 주는 상황과 인연들이 있다. 그 상황과 인연이 막다른 길에서 멈춰버린 나를 자연스레 앞으로 인도한다. 퇴근 후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데 이층 할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우편함에 내 이름이 적힌 도톰한 우편물이 있다고 빨리 가져가라고 하셨다. 연락받은 게 없는데?
우편함에는 하나로 묶인 도톰한 우편물이 목재 우편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내 우편물은 책 한 권이었다. 발신인을 보니 출판사 '북치는 소년' 대표인 이민호 시인이었다. 그동안 지역 언론에 시인이 차순정 화가와 협업하여 지역 명소를 소개하던 '그 섬(토포 포엠)'이었다. 페이스북에도 연재를 했기에 종종 좋아요와 공감이 가는 글에는 댓글을 달았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책을 보내준 시인에게 고마웠다. 아직은 돋보기가 없어도 책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시인이 보내주신 책의 목차를 찬찬히 살폈다. 질감이 느껴지는 종이 책으로 접하니 새롭다.
용산 해방촌, 괭이부리마을, 주문진항...추암 촛대바위 등등...세간에 알려진 곳보다는 동네 사람만 아는, 뒷골목에 숨겨진 맛집처럼...
게 중엔 지명은 익숙하지만 그 공간의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당연하다. 지나온 내 생의 어느 시간에도 그 장소에 없었으니. 나름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자부하는데 시인과 화가의 협업 속에 담긴 장소는 대부분 낯설고 생경하다.
다행히 시인이 소개한 장소 한 곳은 몇 년 전에 다녀온 곳이다. 단양 사인암이다. 일필휘지로 그린듯한 기암괴석의 사인암 펜 드로잉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탄식인지 후회인지 모를 시인의 글도 잘 어울렸다.
사인암은 2017년 지인들과 함께 옛 사수의 슬픔을 위로하고 다녀오는 길에 들렀던 곳이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휴대폰 속 앨범을 찾아보니 그날 찍은 사진도 있었다. 다소 스산한 날씨에 선명하던 사인암의 기암괴석들. 그곳의 아름답던 풍광이 떠올랐다. 시인이 보내준 책 한 권이 기억 저편에 있던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다음날 오전이다. 이불속에서 시인이 보내준 책을 읽고 있는데 이층 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총각 오늘은 집에 있는가?"
"네."
"갈비에 양념을 넣으려고 하는데 내가 힘이 없어서 병뚜껑이 안 따지네...와서 뚜껑 좀 따 줘!"
잽싸게 이불을 걷어내고, 갈비 양념이 든 병을 잡고 휙 돌리니 병 입구를 꽉 틀어쥐고 있던 뚜껑이 펑하고 열렸다. 할머니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뚜껑 하나 따는 것도 누군가에겐 버거운 일이다. 아직은 유리병 뚜껑 하나 정도는 거뜬히 딸 힘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