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의 현현...그 만남은 어땠을까?
*오래전에 썼던 서평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다. 쉽지 않았다. 아니 완독까지 꽤나 힘들었다. 요즘 책을 한 권 제대로 읽으려면 전보다 몇 배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가족, 일, 고민, 그리고 잠시 후면 사라질 근심들. 자꾸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 끼어드는 잡념에 사로잡히다 보니 오롯이 책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요즘 내 정신은 그만큼 쇠잔해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 이 책을 만나기 전부터 이 '조르바'라는 인물이 정말 궁금했다.
광부, 요리사, 난봉꾼등 조르바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하지만 그를 단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유'다. 조르바는 욕망에 충실했던 인간이다. 일, 사랑, 쾌락, 분노, 살인, 심지어 차창에 매달린 채 숨을 거둔 죽음마저도 그는 자유의 현현이었다. 조르바는 자신을 고용했던 두목이나 식료품 상점의 주인처럼 인생을 저울질하거나 셈을 하지 않았다. '두목'에게 속박된 몸이지만 노예 같은 삶을 살지 않았다. 오히려 조르바는 사람들 속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두목'의 답답함을 털어내 버리고 춤으로 말하는 법을 깨우쳐 주었다.
조르바의 자유 의지는 본성이다. 그는 그 자체로서 자유다. 흔히 천재는 지적 능력이나 신체의 우월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조르바의 강렬한 '자유의지'도 천재의 한 유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유를 갈망할 뿐 상황과 현실에 타협하기 때문이다. 난봉꾼 조르바의 자유를 향한 열망은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천재적이다.
이 책을 읽었거나 읽을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낙타-사자-어린이의 단계를 넘어선 '초인'을 떠올릴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초인은, 마블식 히어로와는 다른 존재다. 니체는 신을 부정하고 그를 대신할 최후의 인간을 '부처'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처는 수천 년 전 과거 속 인물이다. 하여 카잔차키스는 최후의 인간 '조르바'를 창조했다. 더욱이 조르바는 실존인물이다.
카잔차키스는 크레타를 여행 중 니체가 그토록 열망했던 자라투스트라의 현현(顯現) '조르바'를 만난다. 그와 함께 탄광 사업을 벌이면서 갖은 일들을 겪는다. 그리고 탄광사업은 실패한다. 그 과정 속에서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라는 사람이 가진 인간의 본성인 '자유의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가 지금껏 읽어 왔던 모든 책 보다 조르바와 보냈던 단 몇 개월의 시간이 훨씬 더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쳤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어느새 조르바처럼 변해가는 자신을 인식한다.
"나는 그동안 배운 모든 것을 걸레로 지워버리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알파벳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인 조르바-
조르바는 두목에게 밧줄을 끊지 않는 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롭다는 생각은 밧줄 안에서만 왔다 갔다 하는 움직임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자유란 '멀건 배춧국'이지 '럼주'가 아니라고...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미리 생각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건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는 뭘 하는가? '잠을 자고 있어.' '그럼, 잘 자게.''조르바, 자네 지금 뭐 하나?''여자한테 키스하고 있네.''조르바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은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 밖에는 말이야. 키스나 실컷 하게.'
-그리스인 조르바 p.465-
현대인들에게 조르바식 삶, 즉 인간 본성에 충실한 삶은 가능할까? 이론이나 관념이 아니라 도덕규범 안에서 조르바식 사고와 삶이 가능할까?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만의 삶을 살지 않는 이상. 본성에 충실한 조르바식 삶은 불가능하다. 나 또한 본성에 충실하고 싶다. 자유를 갈망한다. 하지만 나는 자유를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자유의 형식을 원하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하여 언젠가 나를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조르바'를 만나기를 원했다. 조르바를 통해서 초인이 되지는 못할망정 최소한의 자유의지를 배우고 싶었다.
조르바식 삶의 변형이 있다면,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의 '카르페디엠'일 것이다. 김수영의 '자유'와 사르트르의 '실존'도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서 완성된다.
몇 년 전 일했던 직장에서 조르바식 사고와 삶을 사는 사람을 만났다. 그도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삶의 철학이 독특했다. 그의 자유 의지는 조르바처럼 천재적이었다. 자유 의지는 조르바보다도 더 강렬했다. 자유를 위한 행동과 실천 또한 독보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 그가 내뱉은 말들은 거침없고 행동은 본능적이었다. 그의 자유의지를 따르고 닮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았다. 반면에 그만큼 그를 불편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처음엔 일반 상식과 금기를 넘어서는 그의 자유 의지가 부러웠다. 자유의지를 존중했다. 그리고 불편했다. 현실에서 만난 조르바는 내가 책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깨달음을 주기보다는 이해 불가하고 불편한 존재였다. 조르바를 닮고 싫어했던 카잔차키스와 달리 나는 그에게 영향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다. 그와 함께 일을 하는 동안, 그는 영화 '라이프오브 파이'의 리처드 파커(호랑이) 같은 존재였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나를 자유롭게 할 그리스인 조르바의 현현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