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삼체
*이 기사에는 S.F 드라마 '삼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클리쉐와 모방으로 점철된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일순간 새로운 이야기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을 만나면 굉장한 흥미와 재미를 만끽하게 된다.
현재 O.T.T에서 방영 중인 S.F드라마 '삼체'가 오랜만에 그런 즐거움을 만끽하게 했다. 얼마 전에 극장에서 드니뵐레브 감독의 <듄 파트>2도 재미있게 봤으니 오랜만은 아니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즐길 수 있는 S.F 드라마는 정말 오랜만이다.
드라마 '삼체'의 원작은 중국 작가인 류추신이다. 작가는 '삼체'로 2015년 S.F 3대 문학상중 하나인 휴고상을 받았다. '유랑지구'(2019, 궈판)의 원작자이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원작도 찾아서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 정도로 '삼체'는 깊은 몰입감을 안겨 주었다.
발상의 전환, 미스터리, 그리고 스릴러
'삼체'는 스타워즈 같은 스페이스오페라(우주활극)라기보다는 하드 S.F에 가깝다. 독특한 설정과 발상의 전환을 통해 S.F를 좋아하는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재미와 짜릿함을 안겨준다. 이를테면 속도의 한계다.
우주를 다루는 S.F물은 항성 간 여행을 해야 하기에 대부분 광속 이상의 속도를 갖는다. 하지만 '삼체' 속 인류의 속도는 겨우 화성에 로켓을 보낼 정도의 속도이고,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천척이나 되는 삼체인들의 우주선 또한 겨우 광속의 십 분의 일 정도다. 그리고 삼체인 들은 지구의 군인이나 정치인을 공격하기보다는 '과학(science)' 그 자체를 공격한다. 거기에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더한다.
1960년대 중국의 문화 대혁명
천체 물리학자인 예원제(청년:자인 쳉/노년 :로잘린드 차오)는 중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교수의 딸이다. 1960년대의 중국은 제2의 분서갱유 사태라고 불릴 만큼 참혹한 문화대혁명기의 시기다. 공산당에 반하는 사상은 곧 반혁명이며 숙청의 대상이다.
예원제의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상대성 원리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고발을 당한다. 그는 수많은 인민들 앞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공개처형을 당한다. 마오쩌둥이라는 신이 존재하는데 신을 부정하는 상대성 원리는 반혁명이고 그 결과는 죽음이다.
하지만 미국과 러시아가 외계와의 통신을 위한 비밀 시설을 만들었다는 소식에 중국 공산당도 외진 곳에 거대한 안테나를 갖춘 비밀 시설을 건설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을 숙청해 버린 공산당은 천체 물리학자 예원제를 외계와의 통신을 위한 역할을 맡긴다.
"너희에게 경고한다. 회신하지 마라. 회신하면 우리가 갈 것이다."
인류가 그토록 갈망했던 외계 문명과의 첫 번째 컨텍트는 이렇게 무시무시한 메시지로 나타난다.
게임 속 가상공간의 비밀
'삼체'의 주인공인 물리학자 진 쳉(제스 홍 분)과 잭 루니(존 브래들리 분)는 어느 날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V.R 기기를 받는다. 두 사람은 애*의 비전프로 보다 훨씬 생동감 있고 가벼운 은빛 V.R 기기를 쓰고서 가상공간의 게임에 참가한다.
두 사람은 가상공간에서 수 백번 멸망과 문명의 발전을 반복하는 외계인들을 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매번 실패한다. 실패하지만 게임의 레벨은 올라간다. 두 사람은 마침내 게임의 해답을 찾는다. 그리고 그 게임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머나먼 외계 행성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참혹한 현실임을 알게 된다.
옥스퍼드 대학의 베라 예(예원제의 딸) 교수는 제자 5명을 옥스퍼드 대학으로 데려온다. 잭 루니(존 브래들리 분)를 제외한 넷은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하지만 베라 예 교수는 어느 날 갑자기 수수께끼만 남긴 채 건물 수조의 깊은 물속으로 몸을 던져 버린다.
그리고 전 세계의 물리학자들의 눈앞에 알 수 없는 숫자들이 나타난다. 그들 또한 지금껏 자신이 평생을 바쳐 연구해 온 물리학 이론이 더 이상 의미 없다며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런 괴이한 현상은 앞으로 인류가 마주할, 가혹한 환경과 문명을 재건하기 위한 삼체인들이 세운 거대한 계획 중 일부다.
'삼체', 그리고 항세기와 난세기
이 드라마를 제대로 즐기려면 '삼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삼체, 단순히 3개의 물체(태양, 항성)를 말하는 건 아니다. 삼체역학의 세계에선, 태양이 하나뿐인 태양계처럼 항성들의 운동법칙을 계산하는 게 쉽지 않다. 삼체 세계의 생명체들에겐 가혹한 운명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그들은 삼체 역학의 항성계에서 어떡하든 생존하기 위해서 다양한 해결책을 찾는다. 가상의 게임이 그 해결방식 중 하나다. 삼체인 들은 삼천만 명이나 동원한 이진법의 인간컴퓨터를 동원하면서까지 삼체 항성의 운동 법칙을 알려고 한다.
이는 문명이 발전하는 항세기와 살아남아야 하는 난세 기를 정확히 구별하기 위함이다. 난세기엔 온몸의 수분을 빼내고 두루마리처럼 말린 채 견디고 항세기가 되면 물속으로 던져져서 수분을 흡수하고 부활하여 다시 문명의 발전을 이뤄야 한다.
하지만 이 세계의 지구인 푸엥카레의 정리에 의하면 삼체문제는, 즉 물체의 운동법칙은 영원히 계산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삼체 세계의 외계인들은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기 시작한다. 물체 운동이 일정한 새로운 태양과 자신이 머물 행성을 찾는 것으로. 그리고 머나먼 외계 행성인 지구에서 전파신호가 날아온다.
삼체인 들은 왜 지구에 빨리 오지 못하는가?
고도로 발달한 외계문명의 침공으로 전 인류가 멸망의 위기에 처하는 이야기는 전형적이다. '배틀쉽'(2012, 피터버그)이 그렇고 '인디펜던스 데이' 1(1996, 롤랜드에머리히)이 그렇다. 인류 멸망의 서사는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는 외계인에게 침공을 당한 인류가 적에 맞서서 서로 협력하며 극복하는 과정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삼체' 속 인류 멸망의 첫 단추는 외계인이 아니다. 인류의 자정능력이 없다고 믿는 한 천재 물리학자와 그녀의 추종자들이다. 그들은 광속의 몇십 배로 단숨에 날아와서 인류를 멸절시키지 않는다. 천척이나 되는 거대한 우주선이 가혹한 행성을 떠나 지구를 정복하기 위해서 수백 년을 더 날아와야 하는 인내의 시간이다. 그리고 인류에겐 외계인들이 선사할 인류 멸절의 아포칼립스를 막기 위한 준비와 기다림의 시간이다.
우주의 밤하늘이 나에게 윙크를 한다면
밤에 운동을 하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까맣던 밤하늘이 나에게만 윙크를 보내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드라마 '삼체'에서도 내가 밤하늘을 보며 상상했던 장면과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신기했다. 별을 보며 화성이나 금성(샛별, 개밥바라기별)을 찾기도 하고, S.F물을 좋아 하지만 다중우주나 평행세계는 믿지 않는다. 보거나 경험한 적이 없기에. 이십 대에는 신을 믿고 싶었던 내가, 오십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성경의 바깥을 돌아다니는 유물론자이기에.
'삼체'는 흥미로운 우주 이론과 가설, 독특한 설정들이 재미를 더한다. 광활한 우주에서 인류가 아직까지 외계인을 찾지 못하는 이유를 질문하는 '페르미의 역설', '어둠의 숲'의 비밀, 광속을 넘지 못하는 속도의 한계를 초월한 '양자 얽힘' 현상을 이용한 정찰과 통신, 그리고 동양의 명상과 비슷한 '면벽자' 개념을 통한 히어로의 탄생과 구원의 방식 등 '삼체' 시즌 1에서 던진 떡밥들을 2에서 어떻게 회수할지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