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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시

by 김인철


새벽에 일찍 깼다. 세시가 조금 넘었다. 세시가 조금 안된 것보다는 다행이다. 그래도 네시였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보통은 바로 잠이 드는데 오늘은 다시 잠이 오지 않는다. 문득 '포도시'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어제 위스키를 한 잔 마시고 포도시 잠이 들었다.


포도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는데 창 밖으로 가을비가 내린다. 추적추적, 주르륵주르륵. 비 소리는 지난여름의 매미울음소리처럼 잦아들다가 다시 커지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새벽비가 주룩주룩 새벽을 적신다. 새벽비는 어제 종일 내리던 비와는 이질적이다. 상쾌하면서도 좀 심란한 기분에 젖는다.


쿰쿰한 이불속에서 굳은 몸을 이리저리 뒤척인다. 투명한 유리컵에 얼음을 채우고 냉장고를 열어 페트병에 담겨 있던 물을 컵의 끝까지 채운 후 카누 두 개를 넣었다. 찬기운 가득 입 안에 맴도는 씁쓰레한 커피의 맛과 향이 새벽녘의 몽롱한 정신을 청신하게 깨운다.


즐겨 찾는 유튜브를 켰다. 평론가들이 며칠 전 꽤 재미있게 본 영화를 평론한다. 노회 한 영화 평론가의 신랄한 비판에 날을 세우는 두 젊은 평론가들의 대거리와 이를 지켜보는 진행자의 박장대소, 그리고 딱히 비극적이거나 슬프지 않은 서사들.


쓰다가 멈춘 소설 원고를 열었다. 어떤 말과 문장들은 감탄이 탄식으로 변한다. 미련 없이 삭제한다. 막힌 부분에서 더 좋은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끙끙거리다가 결국 딸깍이는 청축 키보드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손가락 열개를 멈추었다. 주룩, 주룩 나리는 창밖의 빗소리는 소설의 서사와 캐릭터에게 어떤 감흥도 보태지를 않는다. 당최 마침표가 보이지 않는....


미완성인 소설의 문을 닫는 건 쉬워도 다시 끼이익 열고 들어가려면 우주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결국 포도시 열었던 소설에 몇 문장 보태지 못하고 다시 닫아버렸다.


*포도시 : 겨우, 간신히 라는 의미의 전라도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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