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용 센터에 가면
-1-
1.5미터. 흠 1.5미터라니요.
그 정도의 높이로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은 우리 주변에 무엇이 있을까요? 초등학교 6학년 학생 정도의 키, 아니면 ‘이탈리안 잡’에 나오는 미니 쿠퍼의 높이. 그리고... 그리고... 아! 이런, 짧은 시간 동안에 1.5미터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군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1.5미터는 좀 특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나 생각일지라도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하니까요. 당최 무슨 말이냐고요? 그러니까 저는 지금 1.5미터가 제게 혹은 누군가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흠... 말을 해놓고 보니 어째 과거형이 되어 버렸군요. 그 점을 딱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결과를 놓고 보자면.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상당히 큰 손해였으니까요. 맞아요. 제가 바로 1.5미터 사람들 중 한 명이었어요. 혹시 제 키가 1.5미터냐고요. 그런 '루주'스런 생각을 하셨다니 실망인걸요. 저를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너무 쉽게 보신 겁니다.
과연 '1.5미터의 사람들'은 어떤 능력을 소유한 걸까요? 그래요. 앞에서 세 번째 줄, 당신. 상당히 비슷했어요. 그렇지만 역시 정답은 아니에요. 저는 1.5미터라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키를 말하거나 1.5미터를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시답잖은 능력이 아니지요. 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그런 만화 같은 인물도 아니지요. 투명인간이 되거나 모든 사물을 투시할 수 있는 능력도 아니에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아무거라도 좋아요. 그렇지만 쉽지는 않을 거예요. 여러분들은 이미 경험이라는 틀에 갇힌 존재들이니까요. 게다가 눈이 먼 고양이는 아니지만 모든 일을 알 수 있는 전능자도 아니니까요. 시간이 별로 없군요. 이제 조금은 궁금해지셨나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싶었을 거예요.
제게는 1.5미터를 계단처럼 오르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요. 잊지 마세요. 시제는 항상 현재가 아니라 과거형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저처럼 1.5미터를 허공에서 계단처럼 오르고 내릴 수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말이에요. 우선은 일층 정도는 가볍게 오르내릴 수 있겠죠. 그리고 3미터가 넘지 않는 담 정도의 높이도 마음대로 오르내릴 수 있겠군요. 또 생각해 보세요. 무척이나 유쾌하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이런 특별한 능력을 남의 집 담을 타거나 하는 정도로 써 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리고 또 하나 궁금한 것은 이런 능력을 가진 당신이 정치인이라면 혹은 과학자라면 운동선수라면, 또는 할 일 없는 백수라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요? 아마도 가장 유리한 것은 남의 담을 타 넘는 양상군자들이 아니겠어요. 그들 즉 밤손님들에게 1.5미터를 오르내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그들에겐 수입 면에 있어서는 참 좋은 일일 테니까요.
이보세요. 거기 당신! 하품 같은 건 하지 말아 주세요. 아무리 ‘인생은 그런 것!’이라지만, 재활용 도시의 새벽인 지금은 두 눈이 초롱초롱해야 할 시간이거든요. 저쪽에도 지금 제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분이 계시는 것 같군요. 그럴 거면 처음부터 저를 보지 말았어야지요. ‘멋지다 썩은 떡’은 괜히 먼지 풀풀 쌓인 서재 속에서 십 년이 넘도록 썩어가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가 귓밥 가득한 당신의 귀속에다 풀어놓는 ‘멋지다 썩은 떡’ 같은 아주 신기하면서도 그럴듯한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보세요. 다시! 방금 전까지 전 1.5미터를 계단처럼 오르내릴 수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잊지 마세요.
그런 특별한 능력이 어떻게 해서 나라는 사람에게 주어졌는지 궁금하지 않으신 분은 굳이 ‘멋지다 썩은 떡’ 같은 비참하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셔도 상관은 없어요. 재활용 도시를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아니 비극이니까요. 마치 재활용 도시가 형성되기 전 모든 사람들이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앞과 엽을 맞추는 ‘앞으로 나란히’를 하거나 ‘나는 재활용 도시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문구를 외워야 했듯이 그런 지루한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필요는 없어졌어요. 더구나 재활용 도시에서 제가 만난 사람들, 각 분야의 사람들이 이 1.5미터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혹은 사용을 당했는지도 아실 필요가 없어요. 알아도 별 소용이 없거든요. 그렇지만 제가 이 재활용 도시에서 만나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 재산의 절반을 내놓고서라도 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으니까요.
우선은 이 1.5미터의 능력을 최초로 갖게 된 사람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그 사람은 키는 작았으며 허리가 약간 구부정한 오십 대 중반의 사내였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최초로 이 1.5미터의 능력을 갖게 되었을까요?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는 일이지요. 왜냐면 그 사람은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으로 물었을 때도 입을 굳게 다물었고 심지어 눈물을 머금고 물었을 때조차 확실한 답을 해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엿가락 늘이듯이 애타게 만들다가 포기를 할 때쯤 적선하듯이 한마디 해주더군요. 그의 신상에 관한 언급을 잠깐 하자면 그는 재활용 도시의 최남단에 있는 한 섬의 등대지기였으며 스무 살이 되기 이전부터 약 삼십여 년 간을 외로이 등대지기 생활을 했었지요. 한 달에 한 번이나 배가 올까? 싶은 외진 곳이었지요. 사실 그는 무척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었어요. 그럼에도 그가 수십 년 동안 파도와 기러기뿐인 외딴섬에서 등대지기를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선천성으로 타고난 소아마비 때문이었을 거예요. 처음부터 외지인과의 왕래가 없었으므로 그는 감정적으로는 외롭다,라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었죠.
어느 날 그 섬의 자그마한 부두에 낯선 배가 한 척 접안을 하고 사내와 여자 두 명이 내리죠. 밤이 될 때까지 그들은 섬을 돌아다녔어요. 등대지기는 낯선 외지인의 출현이 두려웠지만 또한 호기심이 들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누구보다 신중한 편인 그는 단지 멀찌감치 서서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죠. 밤이 되자 사내와 여자는 등대지기를 찾았고 등대지기는 그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죠. 그들은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잠시 그를 사로잡았던 두려움은 사라져 버렸고 십년지기처럼 친구가 되어버렸어요. 배에서 가져온 술과 음식도 세 사람이 밤새 놀고먹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어요. 그리고 새벽 무렵 판단이나 이성이 마비될 때쯤 사내가 등대지기에게 모종의 제안을 했던 거죠. 감옥 같은 섬을 떠나서 재활용 도시의 번화가로 나가라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 일테면 양상군자가 같은, 그런 약속을 하면 등대지기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겠다는 것이었죠. 사실 그에게 외로움이 아무것도 아니었듯이 도덕성이라는 것도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어요. 사회적 경험이 전무한 자에게서 도덕성이 갖는 의미란 늑대에게서 자란 인간이 자신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놓고 다녀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거예요. 여하튼 소아마비로 태어나서 한 번도 온전히 걸음을 할 수 없던 등대지기에게 그런 제안은 무척이나 솔깃했죠. 온전히 걸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들에게 없는 능력까지 가질 수 있다니 말이죠. 그는 딱 삼일을 그렇게 고민을 했어요. 그리고 나흘째 되던 날 그는 수 십 년간 해왔던 등대지기 자리를 과감히 버리고 마침내 육지로 나왔던 거죠.
-2-
통계학적으로 볼 때‘후천성 정신 면역 이상자’들의 세계는 온통 회색이 아닐까 싶어요. 그들에게 세계란 단지 짙음과 옅음만이 존재하는 흑백 화면의 창문 같은 거 아닐까요? 게다가 그들이 보고 듣는 세계는 물방울무늬의 환자복이나 회색 벽, 그리고 의사들의 흰 가운뿐이니까요. 정통한 의학계의 학설에 따르면 후천성 정신 면역 이상자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유전적인 소인이 발견된다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그것이 절대적이지는 않아요. 모든 것은 언제나 가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거니까. 특히나 세계 유수의 잡지에 정기적으로 자신들의 논문을 실어야 실력을 인정받는, 엘리트 의식에 꽉 사로잡힌 의사들의 논문 같은 경우에는 더욱 그렇죠. 모든 것들이 회색으로 포장된 정신 병동에서 생활하는 후천성 정신 면역 이상자인 난쟁이 Y군에게도 어느 날 1.5미터의 능력이 생겼어요. 그가 처음 그런 능력이 생기고서 일을 벌인 것은 자신이 이 답답한 회색 병동에 입소할 때부터 난쟁이 똥자루만 하다고 놀려대던 2미터가 넘는 장신의 간호사를 이단 옆차기로 날려 버린 거예요. 그런 다음 1.3미터를 올라가서 그의 정수리에 끝이 뭉툭한 송곳을 정통으로 꽃아 버린 거예요. 물론 그는 그러한 행동을 한 죄로 열흘간을 독방에 수감되었지요.
게다가 그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 다른 후천성 정신 면역 이상자들의 심리적 압박과 괴팍한 행동 패턴이 더 심해졌다며 아예 한 달에 한 번씩 있던 가족들의 면회조차 거부당했지 뭐겠어요. 과연 누가 이 감옥 같은 병동에도 그런 능력을 전해주고 갔을까요? 난쟁이 Y가 지난 열흘간 만난 외부인이라곤 오전에 한 번씩 회진을 도는, 누가 봐도 명백한 흰머리를 새치라고 주장하는 주변머리 없는 주치의와 환자들이 화장실 변기의 물을 내리지 않는다고 불만이 가득한 뚱뚱한 청소부 아줌마뿐인데 말이에요. 어쩌면 1.5미터라는 능력은 공기처럼 퍼져나가는 바이러스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런 유전적인 소인이 있는 사람들에게 닿았을 때만 발현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것은 과연 그들에게 좋은 일일까요? 또 우리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는 걸까요.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바이러스가 좋은지 나쁜지를 판별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겠어요. 좌우간 난쟁이 Y군은 정확히 오전 10시 30분이 되자 그 정신 병동에서 사라져 버렸어요. 그날은 유일하게 운동을 할 수 있는 토요일 아침이었거든요. 그는 자꾸 미모의 아나운서가 여덟 시 뉴스를 전하다가 자기를 보고 윙크를 한다던 망상증 환자와 두 시간이 넘도록 배드민턴을 치다가 3미터가 조금 못 되는 담장을 넘어서 어디론 가로 사라져 버렸어요.
-3-
전형적인 예술가 타입의 P 씨는 오늘도 꽉 막힌 도로 위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군요. 그는 지금 잠시 후면 직장에서 벌어질 상황을 상상하면 할수록 정말로 돌아버릴 지경이었어요. 게다가 평소면 십 분이면 도착할 회사를 사고가 났는지 벌써 삼십 분이 넘도록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 하고 있었죠. 여기저기서 빵빵 거리는 소리가, 십 초마다 한 번씩 울리는 그의 휴대폰 소리와 맞물리며 그를 더욱 미치게 만들고 있었죠. 틀림없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의 주변머리 없는 <재활용 백화점>의 마케팅부 팀장일 거예요. 원리 원칙주의자인 그는 거의 한 달 동안 밤을 새워가며 세운 광고 기획안을 진부하고 식상하다며 채 십 초도 지나지 않아 그가 보는 앞에서 북북 찢어버렸죠. 그 생각만 하면 당장이라도 말할 때마다 출렁이는 그의 볼 살을 갈겨 버리고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죠. 벌써 세 번째 옮긴 광고 회사인데 그가 아무리 15초의 예술이란 광고업계에서 능력 있고 인정받는 카피라이터라지만 업계에서 더 이상 까탈스럽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거든요. 사실 그는 이미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도 한번 사장 앞에서 책상을 뒤엎고 나왔거든요. 알다시피 이 도시의 재활용 백화점 마케팅부라는 게 바닥이 손바닥이거든요.
그나마 이 숨이 막힐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위안을 찾는다면 얼마 전에 만난 낯선 사람 때문 일거예요. 자신을 남쪽 ‘나’ 지구의 바닷가에서 왔다는 그 사람은 어느 날 새벽 계단이 없는 이층 창문에서 동이 틀 때까지 전형적인 예술가 타입의 P 씨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잠결에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P 씨는 그날따라 일찍 잠이 깼고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었죠. 그가 어떻게 계단도 없는 곳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요. 창문을 똑똑 두드리던 사내의 말투와 억양은 남쪽 ‘나’ 지구식 사투리가 강했지만 이따금씩 재활용 도시의 표준말도 아주 유창하게 구사를 했어요. 그렇지만 종종 ‘나’ 지구식 억양이 뒤섞여서 묘한 말투가 되기도 했지요. P 씨는 하필이면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왔는지를 물었지만 그는 P 씨의 물음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자신이 찾아온 목적만을 이야기했어요. 그 제안이란 그러니까. 원한다면 남들이 없는 특별한 능력을 한 가지 주겠다는 것과 그 능력을 사내가 지정한 일에 쓰는 것이었죠.
P 씨는 처음엔 그를 정신이상자 거나 아니면 시시 때대로 ‘도를 아십니까?’ 라며 귀찮게 구는 부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가 세 차례나 계단 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광경을 보고선 생각을 바꿨죠. 손해 날 것도 없었어요. 어차피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도 일주일 안에 때려 칠 작정이었으니까. 그는 그 이상한 능력을 받은 후 재활용 정부 산하 공무원이 되어야 했어요. 처음엔 마땅치 않았죠. 시에서 발주한 광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다가 미쳐 버리는 줄 알았거든요. 융통성은 제로인 데다가 답답하고 안하무인, 그리고 결정적으로 매 껄끄러운 사안이 생길 때마다 책임전가를 하는 거예요. 원래는 광고 기획안을 1부만 내면 되는 것을 평가위원에게 보여야 한다면서 제출 전날 열 부를 복사하라는 거예요. 그것도 원래는 자기가 해야 되는 일이거든요. 새벽 두 시까지 복사해서 다음날 아침에 제출했더니 글쎄 아침에 보낸 메일 확인 안 했냐면서 버럭 화를 내는 거 있죠. 완전히 미치고 팔딱 뛴다니까요.
-4-
인구 백만이 조금 넘는 재활용 도시의 의원 회관을 나서는 한 야당의 재선의 원인 J 씨는 아무래도 기분이 찜찜했어요. 3년 연속 재활용 도시의 우수 시의원인 자신이 다음 달에 있을 선거에서 어쩌면 공천을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우울한 생각이 들었거든요. 자신의 지역구인 재활용 북쪽 ‘가’ 지구의 공천경쟁이 유달리 심한 이유도 납득이 가질 않았어요. 더구나 평생을 견(개)권과 환경 운동에 몸담았던 시민단체의 수장이 모든 기득권을 버리겠다며 며칠 전에 자신의 지역구인 북쪽 ‘가’ 지구에 ‘출사표’를 낸 것도 그를 불안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지요. 사실 그는 지난 총선 때 전 재산을 털어가며 시장 선거에 출마해서 떨어진 후로 종종 정치에 환멸을 느끼곤 했지요. 시의원 사모님 소리를 들어가며 동창회나 부녀회에서 짐짓 위세를 떨고 싶어 하는 아내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정치판을 뛰쳐나왔을지도 몰라요. 기실 그는 종종 그를 우습게 여기는 시민보다는 속물적이긴 하지만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거든요. 앞서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정치에 모종의 환멸을 느끼고 있던 이 사내에게도 어느 날 그 남자가 찾아왔어요. 그러니까 그는 한 복지 단체에서 주관한 모금행사에 참여를 했고 그가 행사 말미에 끙끙거리며 화장실 좌변기에서 볼일을 보고 있을 때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죠. 사내는 무척 당황을 했지만 노크를 한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남쪽 ‘나’ 지구식 사투리를 늘어놓았어요.
그 제안이란 것이 처음엔 사내를 무척이나 화나게 만들었죠. 그러니까, 그 이상한 사내는 3년 연속 재활용 도시의 우수 시의원으로 뽑힌 자신에게 1.5미터의 능력과 세상에서 구두를 가장 잘 닦을 능력을 주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는 자기를 도대체 뭘로 생각하는 거냐며 연신 화장실의 물을 내리는 걸로 답을 했어요. 그리고 그가 잊을만하면 화장실 같은 난감한 상황에서 나타나서는 똑같은 제안을 하고 사라지고는 했어요. 1.5미터 만이라면 모를까? 정치와 구두닦이는 그다지 연관성이 없는 일이며 신분상으로도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일일 텐데 그 이상한 사내는 뭘 믿고 J 씨에게 그런 제안을 하는 걸까요? 그렇지만 인간은 참으로 영리하면서도 어리석은 존재라는 사실을 그 이상한 제안자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성자가 된 청소부> 혹은 <총리가 된 미화원> 같은 바람직한 예를 들면서 말이죠.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던 3년 연속 우수 시의원 J 씨는 자꾸 그런 제안이 반복되자 점점 생각이 달라졌어요. 시의원이란 허울만 좋은 자리였지 선거판에 쏟아부은 돈을 아직도 다 갚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구두닦이 협회 수장의 말로는 잘만 하면 연봉 일억은 일도 아니라고 했거든요. 마침내 3년 연속 우수 시의원이었던 J 씨는 폐타이어 당의 공천을 포기하고 재활용 도시의 종합시장으로 올라가는 지하상가 계단 한쪽에 조그만 구두닦이 간판을 내걸었어요. 졸지에 시의원 사모님에서 구두닦이 아내로 전락한 아내는 삼일 간을 병원에서 앓아누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5-
삼 년 차 초등학교 교사 L 씨의 경우.
그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재활용 도시에서 가장 잘 나가는 학교였어요. 한마디로 선생님들이 모두 무협 영화의 주인공을 해도 될 만큼 학생들에게 장풍을 잘 쓴다는 사실이에요. 교장은 교감에게 교감은 학생부장에게 학생 부장은 평교사들에게 그리고 평교사는 학생들에게 말이에요. 그들에게 장풍은 기본이었죠. 그리고 선생님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특기가 있었죠. 어떤 선생은 어디를 꼬집었을 때 학생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어요. 어떤 선생님은 표 나지 않는 인신공격이 압권이었죠. L 씨는 삼 년 차가 되면서 겨우 장풍을 쓸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오장풍 같은 강력한 장풍을 쓰지 못하는 L 씨는 매일 교감에게 불려 가서 욕설 신공과 조인트 신공 그리고 뺨 때리기 신공을 몸으로 배웠죠. 그 남자가 L 씨 앞에 나타난 것은 2반의 <오장풍>과 5반의 <제물포> 선생처럼 떨어진 점수만큼 장풍과 물대포를 날려야 하는지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L 씨가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그 남자는 L에게 1.5미터의 능력으로 무엇을 할 건지를 물었어요. 그가 한동안 대답을 못하자. 고맙게도 남자는 선택을 하라고 하더군요. 그는 다섯 가지의 제안 중에서 마지막을 선택했죠. 개와 고양이들에게 도덕과 분수, 그리고 사칙 연산을 가르치는 일이었어요. 남자는 고양이들끼리 쓰레기통에 버려진 생선 대가리를 놓고 싸우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거든요. 앞의 네 가지 제안을 들은 L 씨는 이건 뭐. 이따구야!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어요. 고양이에게 도덕과 분수를 교육시키는 것은 일견 어려워 보이긴 했지만 앞의 네 가지 제안보다는 훨씬 수월했으니까요? 첫 번째는 비리 부패 정치인들, 교장도 포함, 에게 황금 보기를 돌같이 여기도록 만드는 거였어요. 두 번째는 멀쩡한 강을 살리겠다며 이 도시의 모든 재활용품을 쏟아붓고 있는 시장과 그 휘하에 있는 관료들을 설득하는 거였어요. 그게 어디 1.5미터의 능력으로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 나머지 것들이야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되겠죠. 그날부터 L 씨는 밤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들 고양이와 주인을 잃어버린 불쌍한 개들을 찾아 나섰던 거죠.
-6-
그 이상한 사내는 저를 포함해서 앞에서 언급된 사람들에게 1.5미터 플러스알파의 능력을 주고서도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았어요. 그는 정말 바람직한 <기부자>의 전형이었죠. 단지 그가 내건 조건은 그가 언젠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그동안 자신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이야기만 해주면 된다는 거예요. 게다가 그는 이 과정이 끝나고 나면 가장 효율적이며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은 사람에겐 평생 1.5미터의 능력을 갖게 해 주겠다고 했어요. 다만, 그가 언제 다시 나타날 것인가는 말해주지 않았죠. 한 달이 될 수도 있었고 십 년이 될 수도 있었죠. 그는 ‘언제?’ 라기보다는 ‘지금 여기’가 더 의미 있는 거라며 현실에 충실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지금 이후의 어떤 상황들은 ‘나비 효과’처럼 발생할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한 가지 빼먹은 게 있는데 혹시 눈치채셨나 모르겠군요. 그래요. 제 이야기를 하지 않았죠. 그 남자가 어떻게 저를 찾아왔고 또 저는 그에게 어떤 제안을 받았는지를 말이죠. 하지만 제 이야기는 여기서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여러분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더 흥미 있어한다는 것. 그게 본질이니까요.
-7-
그가 우리들에게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은 대략 8개월이 지나고 나서였어요. 봄이 가기 전에 사라졌다가 겨울이 올 무렵 다시 나타났던 거죠. 사내는 필시 겨울에 태어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번엔 처음 등대지기를 만날 때 함께 있었던 미스터리 한 여자도 함께 나타났죠. 한데 남자에 비하면 여자는 지금껏 아무런 역할이 없어요. 등대지기 앞에서 술에 떡이 된 채 쓰러진 것 외에는. 도대체 그 여자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남자는 처음 나타났던 것처럼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나타났어요. 각자에게 아주 잠깐 모습을 보인 후 만나야 할 시간과 장소만을 말하고 사라졌어요. 그러니까 그전까지 우리는 서로를 전혀 몰랐던 것이죠. 점조직처럼 어떤 목적이나 방향은 없는, 거리를 지나치는 이들을 보면서 한두 번 정도 의심을 해 볼뿐 누가 1.5미터의 능력을 지녔는지를 알 수가 없었던 거예요. 우리는 그냥 각자의 자리에서 그 별것 아닌 능력을 발휘했던 거예요.
“자! 그럼 누구 이야기부터 들어볼까요. 예술가 타입의 P 씨 이야기부터 들어 볼까요?”
이상한 사내는 처음부터 순서를 짜왔다는 듯이 이야기를 할 순서를 정해주었어요.
예술가 타입의 P 씨의 1.5미터 회상
저는 처음엔 저분이 그런 이상한 능력을 주겠다고 했을 때 많이 망설였어요. 사실 처음 사내와 여자를 만났을 땐 “돌을 아십니까?” 부류라고 생각했었어요. 어제도 집을 가는 길에 세 번이나 만났거든요. 게다가 세상에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정말일까? 그런 능력이 나에게 생긴다면. 점점 그런 쪽으로 흘렀죠. 마침 제가 처한 상황은 최악이었어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떠오르지 않는 광고 카피, 남자에게 제안을 받던 날은 경쟁업체의 기막히게 멋진 프레젠테이션에 세 번째 물을 먹은 상태였죠. 돌파구 같은 것이 필요했었는데 저기 앉아 있는 사내가 세 번이나 저를 찾아와서 그런 제안을 하니 나중엔 생각이 바뀌더군요. 그래. 밑져야 본전이다. 처음엔 경쟁 업체를 찾아갈까 했어요.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죠. 미련은 일찌감치 버리는 게 좋아요. 체육관이 아니라 미술관을 선택한 것은 모나리자 때문이 아니었어요. 모나리자. 그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싶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남자의 제안이었죠. 거부할 수 없는. 모두 땀 흘려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시간에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이 궁금했던 거죠. 예술가들이야 그들의 밥벌이니 그 시간에 있는 것이 당연했지만 어쨌거나 전 재활용 도시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박물관을 찾았어요. 저는 우선 조각상이 전시되고 있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어요. 1.5미터로 서거나 앉은 채 하루 종일 사람들을 관찰했어요. 처음엔 아무도 저를 주목하지 않았죠. 옆에 재활용된 ‘다비드 상’이 있었거든요. 벽에 붙은 그림, 조각, 서체. 저는 그런 전시물 중 하나였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1.5미터로 앉아 있는 저를 쳐다보기 시작했어요. 삼일 째 되던 날, 우연히 하품하는 장면을 누군가가 봐 버렸거든요. 한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자 관심은 폭발적이었어요. 순식간에 저는 가장 관심을 끄는 전시품이 되어 버린 거죠. 저는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은 저를 보면서 신기해했죠.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졌어요. 그때 문득 이런 카피가 떠올랐어요.
“전시되어야 할 것들은 박물관에만 있지 않습니다.”
난쟁이 Y군의 경우.
사람들은 모두들 나를 미쳤다고 손가락질하기에 바빴지. 하지만 난 미치지 않았어. 단지 그런 척만을 했을 뿐이거든.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냥! 다람쥐 쳇바퀴처럼 사는 게 좀 지루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이벤트 회사의 사무실에선 커피포트와 복사기랑 농담 따먹기를 하고 집에 와선 9시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에게 제법 진지하게 프러포즈를 했더니 며칠 후 회사에선 권고사직을 당하고 다시 며칠이 지나니 흰옷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 내 방으로 들이닥치더군. 그래도 처음엔 견딜 만했어. 나름 사람들을 속이는 재미도 있었다고. 장담하건대 나는 분명히 미치지 않았으니까. 재활용 병동에 있던 환자들 중 절반은 그런 식이더란 말이야. 의사들은 환자를 진찰하고 환자들은 또 의사를 진찰하고 그런 일들이 다반사였지. 정말로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은 삼분의 일이나 되었을까. 실제로 몇몇 신참 정신과 의사들은 선배 의사들의 충고를 듣고 먼저 와서 장기 입원 정신질환자들엑 상담을 신청하기도 했었거든. 아 글쎄! 어떤 신참 의사는 나한테도 상담을 신청했다니까. 한 3개월 정도 지나니 그곳도 지루하긴 마찬가지더라고. 한 일주일 정도 정수기와 탁구대에게 말 걸기를 삼갔더니 나를 감시하는 시선이 느슨해지더군.
그 정신병동의 실세인 부원장이랑 수간호사와 허물없는 친구 사이가 될 무렵 저 사람이 나타났어. 나도 처음엔 방귀나 뿡! 했었지. 하지만 한 세 번 정도 만나니 그에게 이상한 신뢰가 생기더란 말이야. 하여 그가 주겠다는 능력을 받았지. 탈출했어. 그리고 처음 찾아간 곳이 아마도 그녀가 사는 집의 담벼락이었어. 따지고 보면 나의 지루함은 바로 그녀로부터 비롯된 것이니까. 복수를 하겠다거나 미련이 남아서는 아니었어. 단지 그녀가 사는 담벼락 옆의 탐스러운 복숭아 몇 개가 탐이 났을 뿐이거든. 단 한 번도 내 손으로 그 탐스러운 복숭아를 따 먹은 적이 없었거든. 1.5미터라면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야. 핵폭발과도 같은 이치 같은 거지. 발사 버튼을 누르기 전까진 그것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모든 것은 그래. 단지 한 끗 차이야. 그 한 끗 차이로 정말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어. 나는 단지 복숭아를 따 먹었을 뿐인데. 그녀가 나를 다시 만나주겠다는 거지 뭐겠어. 만약 그녀를 먼저 찾았다면 복숭아는 그냥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겠지. 이것도 핵폭발과 같은 이치야. 발사버튼을 누르기 전까지는 그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거든. 설령 발사버튼을 눌러도 그것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거든. 복숭아를 따먹은 날 이후로 모든 일들이 술술 풀렸어. 복사지가 걸려버린 ‘제록스’가 말을 걸어도 저는 더 이상 대꾸를 할 필요가 없었지. 의미를 부여하느니 차라리 침묵을 지키고 뒤돌아 앉는 편이 이득이야. 하다 보니 말이 길어졌군. 정리를 하자면 복숭아는 아직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고 그녀는 여전히 내 곁을 지키고 있고 세상은 평화. 아니. 공존. 아니 타협. 아니 스스로 그러하듯이 원래 그대로라고나 할까?
구두닦이가 된 시의원 J 씨의 증언
젠장, 1.5미터가 여러분들에겐 밥이라도 먹여 주었던가요? 일단은 1.5미터의 높이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환멸을 느끼고 말았죠. 그동안 내가 별 것 아닌 것 같은 감투에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아득바득거렸는지를 비로소 깨달았거든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감투를 스스로 내려놓았다는 거예요. 찢긴 폐타이어당의 공천을 받으려고 수 천 만원씩 갖다 바치고도 공천에서 떨어져 버리고 말았으니 차라리 구두닦이를 하겠다고 나선 제가 다 속이 후련하더라고요. 사실 구두를 닦는 일은 능력이랄 것도 없었어요. 신기할 것도 없죠. 어린 시절, 학비를 벌기 위해서 아침부터 새벽까지 신물이 나도록 했던 일이니까요. 한동안 잊고 있었어요.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지난 몇 개월 동안 1.5미터라는 능력보다는 구두를 닦는 일이 더 신나고 흥미로웠어요. 1.5미터의 능력이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구두를 닦는 일이야 말로 진정한 삶의 보람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1.5미터는 그런 거였어요. 게다가 변화는 나에게만 일어난 게 아니에요. 내가 구두닦이가 된 후로 아내는 처음엔 우울증을 앓았어요. 졸지에 시의원 사모님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지하상가의 구두닦이 아내로 전락해 버렸으니 말해 뭣하겠어요. 전에는 형식적이었던 복지관 자원봉사도 거의 상근을 하다시피 하고 있어요. 그 모습이 좋기는 한데 이따금씩 저녁을 자장면으로 때워야 할 때가 있어요. 아이들도 한동안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죠. 하지만 아이들은 버텨주었어요. 이 시점에서 정치를 다시는 안 하겠다거나 그런 것들에 여전히 환멸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에요. 단지 그동안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할 상황이 왔을 때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죠. 어쩌면 그게 가장 큰 수확일지도 모르겠어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삶.
삼십 년간 등대지기 H 씨의 증언
나 말여! 아 긍께 뭐시냐? 나 같은 경우는 한때 외화 시리즈인 ‘프리즌브레이크’에 빠졌던 적이 있었지. 나가 섬에서만 수십 년을 살았다지만 그래도 텔레비전은 원 없이 봤응게. 석호필인가 스코필드인가 하는 대머리 배우의 치밀함에 혀를 내두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당께. 물론 고것이 잘 짜여진 드라마의 설정이니까 가능한 일이었겄지만서도. 영화나 드라마란 내한테 주어진 1.5미터의 능력 같은 것은 간단히 설정해 버리지 않겄는감. 근디 말여! 현실은 다르당께. 현실에서 1.5미터의 능력이란 정말 엄청 시럽고 대단했제. 우선은 안식년 휴가를 냈당께. 그 전까지 그런 것이 필요가 없었거든. 사실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응께. 흐미 그 1.3미턴가 하는 것이 내를 엄청 똑똑하게 만들었당께. 아 참말이시! 그렇다고 혀도 내가 몇십억 로또를 맞은 것도 아닌데 사직을 할 필요는 없지 않겄어. 내게 이런 능력을 준 사람도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았으니께 말여. 그리고 나서 또 곰곰이 궁리를 혔지. 그 석호필을 보고 있는디 말여. 뒤통수를 탁 치지 않겄어. 독립영화인가 뭐신가 말여. 배우. 나가 한평생 꿈이 그거였는디 말여. 엄청시럽게 유명한 배우 같은 것은 감히 쳐다보지도 않았어. 꿈도 안꿨당께. 근디 말여. 거 엑스트라나 뭐라나! 고거이 또 단역배우라고도 하는 것 같은디. 삼십 년간 14인치 테레비 보면서 내도 한 번쯤 저 쪼맨한 화면 속에 나왔으면 혔는디. 그렇다고 아는 사람도 없고 뭐부터 혀야 할지도 몰랐지 않겄어. 우연히 길을 가고 있는디 전봇대에서 대학생들 졸업 작품 촬영하는데 연기자를 찾는다는 전단지를 봤지 않았남. 그냥 무작정 찾아갔지! 첨엔 그 학상들도 뜨악허니 내를 봤제. 근디 말여. 그 사람들 앞에서 1.5미터를 요로코롬 오르락내리락 했더니. 아예 그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수정하지 뭐겄어. 단역배우라도 할 겸해서 찾아 갔는디 아예 주인공이 되어 버렸으니께 평생소원이 이루어진거나 다름없었지. 원래 주인공이었던 학상한테는 쬐끔 미안혀긴 했지. 재활용 도시 국제 영화제에 비경쟁 부문에 출품되었다고 혔는디. 조만간 레드 카펫에 설지도 몰르겄는디.
-8-
사내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알듯 말듯한 표정을 지었어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외라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그는 줄곧 침묵으로 일관했어요. 가끔씩 여자와 귓속말을 주고받긴 했어요. 정체를 알 수 없던 여자는 무릎 위에 놓인 노트 위에 사람들의 말을 열심히 적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었어요.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죠. 순간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어요. 한숨도 내쉬었죠. 이런 상황은 별로거든요. 게다가 전 그 남자나 사람들에게 해줄 말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그들처럼 1.5미터의 능력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냐는 의미였죠. 사내는 무척 당황했어요. 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한순간에 바뀌었거든요. 차가움. 분노. 경멸. 그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데 걸림돌이 된 것 같은 그런 표정과 눈빛이었죠. 하지만 전 사내의 반응 같은 건 개의치 않았어요. 처음부터 그의 목적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야기를 다 들은 후 사내는 먼저 구두닦이가 된 시의원에게 질문을 했어요.
“당신은 시의원으로 남고 싶습니까? 구두닦이로 살고 싶습니까?”
구두닦이가 된 시의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어요.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번엔 몸을 돌려 반대편에 앉아 있던 예술가 타입의 P에게 질문을 던졌죠.
“예술가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성공한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나요?”
대답을 못하긴 P씨도 마찬가지였어요. 사내는 옆에 있던 삼십 년간 등대지기 H 씨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어요.
“어떠신가요? 다시 외로움 섬을 지키는 등대지기가 되고 싶나요?”
난쟁이 Y 군에게도 질문을 했어요.
“당신은 아직 당신이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저는....아직 깨어나지.”
“깨어나지 않고 싶은 게 아니고요?”
사내는 삼 년 차 초등학교 선생 L 씨에게도 역시 같은 질문을 했어요.
“당신은 어떤가요? 아이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나요?”
"저는 잘....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차례가 되었죠. 하지만 사내는 방금 전의 제 말에 감정이 상했는지 제게는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질문자체가 의미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그의 질문을 기다렸어요. 그리고 왜 제가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대답을 해줄 생각이었어요.
“그럼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묻겠습니다."
당연히 그 모두에서 저는 빠져 있었어요.
"1.5미터의 능력은 과연 누구에게 가야 할까요?
침묵이 흘렀어요. 십오 초 정도. 도저한 침묵이 주는 알 수 없는 긴장감. 마치 이곳엔 저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죠. 하지만 전 알았어요. 사람들은 말은 안 했지만 그 1.5미터의 능력은 자기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사실 그들은 거의 확신에 차 있었죠. 잠시 후 사내의 입에서 나올 말은 상상도 못 한 채 말이에요. 사내는 과연 무얼 말하려는 걸까요? 그는 도대체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요? 1.5미터는 누구에게. 아니 실제로 그런 능력이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일까요? 사람들은 사내를 응시했고 사내는 사람들을 내려다봤죠. 그리고 그의 입에선.
"레드썬."
사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람들은 고개를 살짝 흔들고 작은 경련을 일으켰어요.
“A양, 오늘부로 모든 심리학 실습이 끝났습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장기 최면 프로젝트는 상당히 성공적이었어요. 저기 저 사람만 빼면."
그는 유감이라는 듯 나를 힐끔 쳐다보면서 말을 계속했어요.
"논문은 다음 주까지 제출할 수 있겠죠?”
여자는 소리를 지르진 않았지만 기뻐서 죽어 버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고 이 넓은 공간을 방방 뛰어다닐 것 같은 몸짓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어요.
“다음 논문 주제는 항상 둘이 뭉쳐 다니면서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인문학적 관찰입니다. 도대체 그 사람들 왜 그러는 걸까요?"
-끝-
등장인물
-나 : 주인공이자, 전달자.
-J 씨 : 전직 시의원 출신 구두닦이
-난쟁이 Y 씨 : 후천성 정신 면역 결핍증자 1.5미터 능력을 얻은 후 정신병원을 탈출한다.
-삼십 년간 등대지기 : 최초로 1.5미터 능력을 얻은 자.
-예술가 타입의 카피라이터 P 씨 : 백화점 광고업체 카피라이터
-삼 년째 초등학교 교사 L 씨 : 선생님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중
-1.5미터 남자 : 심리학자, 최면술사
-1.5미터 여자 : 심리학 전공, 대학원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