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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철 Oct 08. 2024

[단편] 낯선 시대의 낙제생

  이 글은 짧은 소설입니다. 소설을 쓰는 동안 부자와 지식인들, 불평 가득한 사람들, 그리고 저를 염려하던 이들에게 제 어설픈 글에 대한 비판을 시시콜콜히 들어왔기 때문에(사실 그래주길 바랐지만...) 저보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습니다.


1.


  재활용 도시에서 검은 핸드백 사태가 벌어진지도 어느덧 십 년이 지났다. 그 사이 재활용 도시에는 검은 핸드백 사태만큼은 아니었지만 크고 작은 사건이 생기고 수습하기를 반복했다. 시청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 유서 깊은 대학교가 있다. 세종대학교다. 세종대학교 국문학과 사무실에서 조교 두 명과 함께 이번 학기 학생들의 기말 시험을 채점하고 있었다.


 "박조교, 이번 기말 시험이 좀 어려웠나? 전체적으로 답안이 좀 평범한 것 같지 않아? 확 눈에 띄는 내용이 별로 없단 말이야. 특히 국문학 개론은 형편없어."


 시험 문제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창조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을 500자 이내로 논하시오.”라는 주제로 그렇게 어려운 시험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답안지만 보고 있던 박조교가 슬쩍 나를 쳐다보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한마디 한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렇게 어려운 주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명확하게 논리를 전개시키는 건 고사하고 맞춤법과 철자 틀린 답안이 대부분이라, 어디에 기준을 두고서 평가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수현 씨는 어때?”


 박조교가 물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조교도 머리를 긁적이며 채점하는데 상당히 고심하고 있는 듯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남은 건 다음에 마무리 짓도록 하지. 참 박조교, 얼마 전 강의실에서 수업을 하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앉아 있더군, 나이는 한 오십 정도 된 것 같은데 도통 말이 없더라고, 자네 혹시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거 없나?"

 

"글쎄요, 최근에 편입한 학생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학과장님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밤 12시가 넘어서 집에 도착했다. 벨소리를 듣고 송이가 잠을 자다 말고 나왔다. 송이는 올해 7살로 자기 또래 아이치곤 꽤나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였다. 그런 송이가 며칠 전 뒷마당에서 UFO를 보았다고 하면서 갑자기 외계인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처음엔 아직 잠에서 덜 깬 송이가 잠꼬대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송이의 눈빛은 꽤나 진지했고 나는 그런 송이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 외계인은 흔히 영화에서 보듯이 징그럽거나 끔찍한 형상은 아니었다고 했다. 머리가 아주 크지도 않았고 몸과 팔다리가 가늘지도 않았으며 눈이 수십 개가 달리지도 거대한 이빨 같은 것이 있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송이는 우리와 똑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외계인을 만난 것이다. 송이는 그 외계인을 인간과 구분하기 위해서 종종 '사람외계인'이라고 불렀다. 그 사람 외계인이 자기를 UFO로 데려가더니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신기한 장치들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출처-pixabay


 그중에 하나가 타임머신이라는 기계였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타임머신과는 다소 다른 것이었다. 과거나 미래를 여행하는 것은 타임머신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에 속했고 기능별로 여러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중에 하나는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기기에 원하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데려오고 싶은 물건이나 사람을 입력하면 작은 유리방에 그 물건이나 사람을 데려오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서 송이는 타임머신을 이용해서 가져온 작은 물건을 하나 보여주었다. 그것은 작은 타원형 모양을 한 돌 같았고 투명한 색이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도무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었다. 송이는 그 기계를 '생각의 돌'이라고 불렀다. 가정교사나 개인비서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 같았지만 사용법은 알 수가 없었다. 송이가 사람외계인과 약속한 기밀사항이라서 그건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2.


 다음날 남은 답안지 채점을 하기 위해서 학과 사무실을 찾았다. 500장이나 되는 답안을 다 채점하려면 앞으로 3일은 더 걸릴 것 같았다. 박조교가 벌써 나와서 채점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김조교가 들어왔고 점심을 먹고 식곤증이 밀려올 때쯤 나는 어제 송이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하하하, 외계인이 준 선물이라니, 교수님 따님은 참 상상력이 풍부하군요.”


 박조교는 내 이야기, 아니 송이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듯이 웃어댔다.


 “그렇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예전부터 감수성이나 상상력이 풍부한 건 알았지만 어젠 사실 좀 놀랬다고."


 김조교는 우리 둘의 대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시험지 채점에만 열중해 있었다. 그때 김조교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나를 불렀다.


 "교수님, 잠깐 이것 좀 보세요?"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갔더니 한 학생의 답안지 하나를 내게 보여 주었다.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다른 답안과는 달리 처음 보는 어려운 한문들이 많이 섞여 있고 맞춤법이나 철자도 엉망인 게 한글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답안지 위의 이름을 보니 '김정음'이라고 쓰여 있었다.


 "흠... 정음이라...."


 교수들과 회식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시간은 11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문화센터 애니메이션 강좌를 나가는 아내는 피곤한지 먼저 잠이 들어 있었고 송이가 문을 열어주었다. 송이는 내가 샤워를 다 마치고 나올 때까지 인형을 안고 거실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오늘 있었던 사람외계인과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 송이는 나에게 '실종.'의 사전적 의미를 물었다. 아직 나이가 어린 송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했지만 호기심이 많은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서재에 있는 국어사전을 찾아서 그대로 읽어 주었다. 


  외계인의 말에 따르면 질량 보존의 법칙은 공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 같은 시간에서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래의 어느 시기에 존재하는 물건이나 사람을 이곳으로 데려 오려면 그와 똑같은 질량을 가진 현재의 사물이나 사람을 그 시간대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씩 텔레비전에 실종 사건이 보도되면 그들 중 상당수는 과거나 미래로 보내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며 칠 전에 옆집 강아지 한 마리가 없어졌는데 그것도 외계인이 데려간 것이냐고 물었더니 송이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서 품에 안고 있던 인형을 내게 보여주었다. 처음 보는 인형이었다.


 그 인형은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머리 뒤에 있는 파란색 버튼을 누르면 평범한 인형이 되고 빨간색 버튼을 누르면 살아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빨간색 버튼을 눌러보자고 했더니 송이는 안 된다고 했다. 버튼에 지문 인식 기능이 있어 10살이 넘은 사람의 지문은 인식하지 못한 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 또한 외계인과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강아지를 잃어버린 옆집 아이가 몹시 슬퍼하고 있다고 했더니 조만간 그 강아지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돌아오지 않기도 하는데 대부분 사람일 경우지만 보내진 그곳이 마음에 들면 사람들은 예전에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에겐 자기가 태어난 곳이나 자란 곳을 그리워하는 성향이 있다고 했더니 그런 건 약 한 알만 먹으면 간단히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아이의 상상력은 시간이 갈수록 더 풍부해졌다. 나는 송이의 이 황당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상상력도 점점 더 풍부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새벽 한 시가 넘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엄마에게도 해 주었냐고 물었더니 송이는 몇 번 이야기했는데 별 반응이 없어서 그만두었다고 했다.


 오후에 있을 세미나 준비를 위해서 나머지 답안 채점은 조교들에게 맡기고 나는 세미나에 필요한 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으로 향했다. 18세기 국문학 관련 연구 자료를 찾고 있는데 서고 한쪽 구석에 웬 남자가 앉아서 상당히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주위엔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자세히 보니 며 칠 전에 강의 시간에 보았던 그 낯선 남자였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은 놀랍게도 '신 한글 맞춤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자세와 표정을 보아하니 벌써 몇 시간째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 번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책을 읽는 사내의 모습이 너무나 진지해서 그냥 관두기로 했다. 마침 근처에 사서가 한 명 있었다. 혹시나 해서 그 낯선 남자를 가리키며 물어보았더니 사서가 대답하기를


 “저 남자 벌써 한 달째 저러고 있어요.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면 하루 종일 앉아서 책만 읽고 있다니까요. 이곳에 있는 모든 책들을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해 했어요. 마치 문자에 한이 맺힌 사람 같기도 하고요. 하루는 너무 걱정이 돼서 조금 쉬어가면서 하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저를 쳐다보더군요.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굉장히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더니 한 며칠 보이지 않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나오기 시작했어요.”


 세미나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사무실에 들렀는데 아직도 채점할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내일 오전이면 다 마무리될 것 같았다.


3.


 오늘도 어김없이 송이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집 강아지가 오늘 아침에 다시 돌아왔다면서 아이가 무척 기뻐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외계인이 송이에게 준 선물은 과거로부터 온 것이었다. 선물이라기보다는 자그마한 아이였다. 오늘은 자기 또래의 옛날 아이를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400년 전 한 시골에서 살던 아이를 데려왔다는 것이다. 아이는 길게 댕기머리를 하고 있었고 위아래로 하얀 옷을 입고 있었고 짚신을 신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텔레비전 사극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 아이가 처음에 깨어났을 땐 주위 환경을 보고 몹시 어리둥절해했지만 외계인이 무슨 물약 같은 걸 조금 먹이자 금방 환경에 익숙해졌다고 했다. 


  송이는 아이가 하는 말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계속 듣다 보니, 몇몇 고어체 문장 외에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약물 탓인지 옛날 아이도 자기가 하는 말을 쉽게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점점 송이가 걱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한 번 데려가 봐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송이의 말을 계속 들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아이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처음엔 무척이나 신기해하더니 시간이 조금 지나자 울먹이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근처에서 동물 병원을 운영하는 부부의 아이가 사라지는 바람에 미친 듯이 아이를 찾아 헤매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다시 과거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다음날 오후가 될 무렵 드디어 시험지 답안 채점이 완료되었다. 고심 끝에 재시험을 치를 명단을 학교 홈페이지와 학내 게시판에 발표하였다. 저녁이 되자 재시험을 치르게 된 학생 몇몇이 사무실로 찾아와서 성적이의를 제기했고 그들에게 알아듣도록 설명을 한 다음 재시험을 치를 것을 설명해 주고서 학과 사무실을 나섰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뒤였다. 운동장에는 땅거미가 짙게 깔리고 있었다. 어둑해진 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는데 저 멀리 담장 근처에 위아래로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사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며 칠 전에 도서관에서 보았던 남자였다. 참 이상한 사람이란 생각을 하면서 그냥 지나치려는데 갑자기 그 사내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날이 어두워서 잘 볼 수 없었지만 뒤를 돌아다본 남자의 표정은 굉장히 슬픈 모습이었다.


 “왜 그러시죠?”


 나를 불러 세운 남자는 막상 내가 말을 건네도 아무런 말이 없이 여전히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머뭇거리기만 하던 남자는 잠시 후 사라져 버렸다.


 그날 이후로 송이는 한동안 내 앞에서 외계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송이는 나에게 '수치심'과 '모욕감'에 관한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물어왔다. 송이의 엉뚱한 질문에 다소 의아해진 나는 아이가 염려되었지만 서재에 놓여있던 국어사전을 찾아서 송이가 물어온 단어의 의미를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 왜 이들 단어의 의미를 궁금해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송이는 오늘 낮에 다시 외계인을 만났는데 그 외계인이 두 단어의 의미를 물어왔다고 했다. 그 외계인은 얼마 전에 과거의 한 남자를 데려와서 내가 강의를 맡고 있는 대학교 국문학과에 편입시켰다고 했다. 그 까닭은 과거의 사람이 낯선시간(현재)에 어떤 식으로 적응할 수 있는지를 연구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외계인은 그 남자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남자가 살던 과거로 돌려보내야 했다고 했다. 과거에서 온 남자는 다름 아닌 세종대왕이었고 그는 얼마 전에 치른 기말시험에서 낙제를 받아서 매우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 송이는


 "아빠가 세종대왕을 낙제 시켰어요."라고 말했다.


<끝>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불멸의 시인'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외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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