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당신들의 천국, 소록도를 가다

by 김인철

수원행 좌석버스를 탄 시각은 오전 10시 49분이다. 한 시간 여를 달려 수원역에 도착, 서둘러 순천행 기차표를 끊으니 11시 55분이다. 기차를 타기까지는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 깔끔하게 정돈된 역사 안의 작은 식당에서 설렁탕으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순천행 기차에 오른 시각은 1시 19분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떠나온 여행 때문일까. 비로소 소록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한겨울의 황량한 들판과 앙상한 나무들을 뒤로한 채 사라지는 차창의 풍경들을 바라보며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이틀간의 여정을 상상해본다. 소록도, 작은 사슴의 섬, 당신들의 천국, 보리피리, 단종대, 한센병은 낫는다. 삶이 힘들고 고달파 심신이 지칠 때마다 종종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사연 깊은 문구와 단어들이 차창 밖으로 사라지는 들판 위로 새록새록 솟아 올라온다.


논산, 익산, 삼례와 오수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풍경들은 마치 오래 두고 사귄 친구처럼 살갑고 정겹다. 십 년을 후에 만나도 낯설지가 않은 그런 사람 좋은 친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별을 고할 때의 여인의 잔망스러운 눈빛처럼 기나긴 여운을 남긴 채 사라지는 열차의 뒷모습은 또 어떠한가? 팍팍한 삶의 무게에 눌린 듯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서 서둘러 발길을 옮겨 버리는 사람들. 나는 뭐가 아쉬워서 한참을 서서 사라지는 기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을까.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 그것은 애초부터 그렇게 살도록 운명 지워진 ‘역’이나 ‘정류장’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 내가 찾아가는 그곳도 잠깐 스치는 곳에 불과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만남들이 그렇듯이. 하지만 찰나 같은 만남 속에서도 영원을 느끼기에 충분한 무엇이 있기에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가 조금 넘었다. 초행길이라 그런지 이러구러 물어야 하는 것들이 많다.

“저기 소록도를 갈려고 하는데요? 어떻게 가면 되죠?”

“저쪽 약국을 돌아가면 녹동행 간이 버스 정류장이 있어요. 한 시간 쫌 더 걸릴 거요. 여섯 시 넘으면 뱃길이 끊길 텐데,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 머물고 다음날이나 갈 수 있겠네요.”

설핏 쉰은 넘어 보이는 중년의 역무원은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친절히 설명해준다. 역무원이 일러준 대로 녹동행 표를 끊고 십 여분을 기다리자 고흥/녹동행 버스가 푸쉭 쉰 소리를 내며 간이 정류장 앞에 선다. 날은 완전히 저물어 듬성듬성 비취는 마을의 불빛을 제외하곤 온 세상이 까맣다. 보성, 벌교, 고흥을 지나 여덟 시가 조금 넘어 녹동에 도착했다. 정류장에 줄지어 서있는 택시 한 대를 잡으며 물었다.

“소록도 선착장요?”

“지금요? 배 끊겼어요.”

그제야 소록도에서는 숙박을 못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출발할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저녁시간을 훌쩍 넘겨서 그런지 아까부터 배속이 먹을 걸 넣어 달라고 요동을 해댄다. 버스 정류장 근처의 허름한 여인숙(1박/15,000원)에 여장을 풀고 식당을 찾았다. 밤이 늦은 탓인지 식당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겨우 찾아낸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펑퍼짐한 몸매의 식당 여주인과 단골손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얼큰히 술에 취한 채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사천 원짜리 된장찌개를 시켰더니 각종 푸성귀며 반찬이 풍성하게 나온다. 게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찌개가 커다란 뚝배기에 담아져 나오는데 세 사람이 배불리 먹어도 남을 지경이다. 간장종지만 한 뚝배기에 서너 가지 반찬이 전부인 도시의 그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우와~ 정말 푸짐하네요."

“그라요? 도시서 왔는가 본데 많이 드시소.”

다음날 소록도행 첫배를 타기 위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잠자리를 가리는 나는 새벽 두 시가 넘도록 방바닥을 이리저리 뒤척이어야만 했다.


핸드폰 알람 소리에 잠이 깬 시각은 아침 일곱 시였다. 8시쯤 선착장에 도착하자 이미 부두에는 소록도행 배가 커다란 입을 벌린 채 자신이 싣고 갈 승객과 자동차를 기다리고 있다. 표를 끊으려고 매표소를 찾는데 한 아저씨가 다가와 어디를 가냐고 묻는다. 소록도를 간다고 하니 이배를 타라고 하신다. 차비는 천 원(왕복)이다. 배에서 바라본 소록도는 정말로 가까웠다. 소록도와의 거리는 불과 600여 미터, 채 십 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잠시 후 소록도의 선착장에 내린 나는 안내판을 유심히 살피며 마을까지 가는 동선을 파악한 후 왕복 2차선의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사진 1. 소록도 선착장, 2차선으로 난 길을 따라 주우욱 올라감>


환자들이 사는 마을은 부두에서 비교적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한참을 길을 따라 걸으니 이청준의 작품 ‘당신들의 천국’의 작품 속 배경이었던 성당과, 교회가 차례로 나타나고 간혹 한센 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사발이라는 미니 오토바이를 탄 채 내 옆을 비켜간다. 그리고 사발을 탄 사람들의 모습은 이곳에 있는 내내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해변을 따라 이십여 분을 걸었을까. 드디어 국립 소록도 병원과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2. 소록도 성당, 잠시 들어가 예배를 드리고 나왔다.>



<사진 3. 환자들의 마을 입구, 왼편으로 소록도 병원과 중앙공원이 있음.>


병사 지대인 이곳은 일반인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붙어 있어서 환자들의 마을, 신생리, 남생리, 동 생리, 녹색리, 구북리, 안쪽으로는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었다. 딱히 이곳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환자들의 가족도 아니니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드나드는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병원을 마주 보고 있는 감금실, 수탄실을 잠시 둘러보았다.


<사진 4. 감금실 전경, 내부에는 한센인들의 정관절제 수술용 단종대가 놓여 있음.>


감금실 입구의 안내문에는 원장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환자들은 어떠한 변론의 기회도 없이 감금, 감식, 금식, 체벌 등을 받아야만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부를 들어서니 마치 교도소에 온 것처럼 삭막한 느낌이 든다. 복도를 따라 오른쪽 맨 마지막 방의 중앙엔 환자들 간의 결혼이나 완치 판정을 받고 출감을 하기 전에 정관절제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는 단종대가 놓여 있었다. 벽면에는 일제하 4대 수호 원장 시절 그의 명을 거역한 벌로 감금 실에 갇혔다 풀려나면서 단종 수술을 받았다는 한 한센인 환자의 한 맺힌 시가 걸려 있다.


단종대


-이동-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수탄 실과 감금실을 지나쳐 오르니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한센인들의 애환과 한이 담긴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 두 동이 보인다. 제1전시관을 지나 들어선 2전시관에는 소록도와 관련된 문예작품이 연도별로 잘 서술되어 있었고 맨 하단에는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이청준의 작품 ‘당신들의 천국’이 한 칸을 차지하고 있어 반가움이 더했다. 그 외에도 한센인으로서 겪어야 했을 아픔들, 가족과의 생이별, 원주민들과의 갈등, 힘겨웠던 오마도 간척사업, 일본인 수호 원장의 가혹과 탄압, 그리고 탄압을 견디지 못한 한 한센인 환자(이춘상)의 살인, 등이 연대순으로 잘 나열되어 있어서 소록도의 비극적인 역사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었다. 환자들이 직접 가꿨다는 중앙공원은 제2전시관을 나오자 바로 이어져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작고 아담한 규모였지만 조경이 잘 가꾸어져 있어서 환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편안한 쉼터가 되기에 충분했다.


<사진 5. 중앙공원 입구, 사진 왼쪽에 제1, 제2 전시관이 있음>



겨울이라 그런지 소록도를 찾는 이들의 발길이 많지 않다. 공원 중앙에 자리 잡은 기념탑 밑에 새겨진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사진 6. 한센병은 낫는다.>



잠시 후 중앙 공원을 내려와 환자들의 복지 지금 마련을 위한 선물의 집을 들어서자 일본인으로 보이는 여자들 셋이서 자기네 나라말로, 간혹 어설픈 한국말을 섞어가며, 사 가지고 갈 기념품을 고르고 있었다. 핸드폰 장식을 하나 사들고 나오니 문이 열린 휴게실의 자판기가 보였다. 소파에 앉아서 달착지근한 커피의 맛을 음미하며 지친 다리를 두드리고 있는데 할머니 두 분이 들어오셨다. 한분은 지체부자유인 것 같고 다른 한분은 한센병 환자 인지 양손에 손가락이 없었다. 할머니 한분이 자판기에 동전을 넣기가 힘드신지 소파에 앉아 있던 나를 부른다.

“총각, 커피 좀 뽑아 줄라오.”

할머니가 건네준 잔돈으로 커피 두 잔을 뽑아 소파로 갖다 드렸다.

“고맙소.”

연세가 어떻게 되냐는 나의 당돌한 물음에 한분은 예순둘, 한분은 ‘나는 내가 몇 살인지도 몰러. 여든셋인가 넷인가.’라며 민망해하신다.

“여기 오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50년도 더 되얏어. 삼천포에서 왔지. 그러는 총각은 어디서 왔는가?”

“서울에서 왔습니다.”

그렇게 할머니와 나는 한참 동안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화 말미에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되냐는 간청에 여든이 넘으셨다는 할머니는 ‘아이고, 그럼 안경을 벗어야지.’라고 하시며 손가락 없는 뭉툭한 팔목으로 돋보기를 벗으신다.

‘그래야 더 이쁘게 나오거든.’

찰칵, 찰칵, 사진을 다 찍자 할머니는 볼일을 다 보셨다는 듯이 일어서신다.

“총각, 새해 복 많이 받고 건강햐.”

“예. 할머니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병사 지대 안쪽으로 사라지시는 두 분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며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처음 올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칙칙하고 어둡고 비극적일 것만 느낌은 단지 책이나 매체를 통해서만 접했던 선입견에 지나지 않았다. 이 작은 사슴의 섬이 지난 백 년 동안 직접 체험하고 목격했을 과거의 비극은 저 잔잔한 수면의 파도처럼 조용하고 평화롭다. 그것은 삶이 아니라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의 시선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이겠지만 누구의 어디의 삶이라도 그런 한계는 있을 것이다. 단지 이곳 또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라는 사실을, 앞으로는 그 어떠한 차별과 서러움이 없기를, 비록 이 작은 섬에 사는 사슴은 없었지만 그 자체로 사슴인 이 섬이 더욱 평화롭고 아름답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인간의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이어야 한다.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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