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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적 고민. 12화

by 김인철

11화 요약


소진은 영국의 여성 ‘소냐’로부터 교수 크리스(K)에 대한 정보를 묻는 의문의 이메일을 받는다. 처음엔 스팸으로 여겼지만, 소냐의 지속적인 메일로 소진은 K의 유학생활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소냐는 K가 옥스퍼드에서 유학시절 친하게 지내던 유학생의 투신 사건과 표절 의혹,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결국 소진은 K가 머물렀던 주소와 소냐의 증언이 일치함을 확인하고,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사건의 실체를 직감한다. 이 모든 조각들이 현재 병실에 누워 있는 경수와의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의문을 품는다.



12화. K와 경수의 설전


그날도 강의를 마친 K와 문창과 학생들은 인사동 모퉁이에 모였다. 뒤풀이 인원은 열한 명이었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강의 뒤풀이는 아홉 시가 넘어갔다. 서서히 빈 의자가 늘었고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렸을 땐 K와 경수, 소진, 소영이, 수아, 그리고 창훈 여섯 명 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구석에 놓인 스피커에선 아바의 노래 “Queen"이 흘러나왔다.


모두들 적당히 취했고 적당히 들뜬 분위기였다. 소영이의 주도로 맥주잔은 벌써 세 바퀴 째 사람들 사이를 돌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음악에 맞춰 기타를 치던 제미정이 이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소진은 그녀와 서너 번 눈이 마주쳤지만 부러 의식하지 않았다.


"오늘 맨정신인 사람은 가만두지 않겠어. 자, 다들 찌끄려. 그리고 빈잔은 머리위로."


소영이 얼굴이 벌개지더니 잠시후 하얗게 익었다. 평소엔 얌전했지만 술이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소영이 앞에서 감히 술을 안 마신다고 뺏다가는 곧바로 앵두같이 야실 하고 오종종한 입에서 입에 담지도 못할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남자건 여자건 소영이에게 찍히는 날엔 엉덩이와 정강이가 성치 못했다. 심지어 평소엔 한마디 말도 붙이지 못할 정도로 어려워하던 K마저도 술자리에서는 그녀에게 봉변을 당하기 일쑤였다.


술자리가 무르익을수록 선명했던 각자의 생각과 언어들이 몸속으로 알코올이 들어갈수록 대화의 흐름은 갈피를 잡기 힘들었고, 모두가 흩어진 생각을 늘어놓다가는 가끔씩 누군가가 방향을 잡았다. K가 입을 열었다.


“수아, 혹시 그 영화 봤나?

“무슨 영화요?”

“매트릭스.”

“아, 그 영화요. 며칠 전에 봤어요.”


수아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경수를 바라보며 수줍은 듯 말했다.


“어땠어?”

“뭐랄까? 내용이 아주 기발했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난 그 따위 영화는 이해를 못 하겠어.

“왜요?”

“매트릭스뿐만이 아니야.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 미셀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펜의미로' 등 도대체 그런 황당한 영화를 만들어서 관객들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내용 또한 현실적이지도 않고 허무맹랑하기만 하거든. 내가 늘 강조하는 거지만 구체성을 띠지 않는 예술은 사기야. 관념의 미학이니, 형이 상학이니 하는 것들은 다 필요 없어. 평론가라고 하는 작자들도 툭하면 현학적이거나 관념적인 말만 내뱉거든. 그러면서 지들이 잘난 줄 알지. 거기서 끝이 아니야. 소위 문학 운운하는 치들도 마찬가지거든. 이를테면 환상문학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운운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뜬구름 잡는 식이야. 도무지 리얼리티라곤 찾아볼 수가 없단 말이지.”

“맞아요.”


창훈이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수아와 소영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K의 견해에 공감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K는 여느 때처럼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그의 평소 지론이었던 리얼리즘론을 펼쳤다. 이제는 귀에 인이 박힐 때도 되었건만 들을 때마다 새로웠다. 그의 말대로라면 리얼리즘의 옷을 입지 않은 문학이나 영화, 예술은 한갓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거의 경멸에 가까운 어조였다. 그래서 그의 비판 대상이 되는 반리얼리즘 작가들은, 이를테면 마술적 리얼리즘이나 초현실주의 작가들, 우리들 사이에서는 거의 용서받지 못할 자들이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네, 문학은 결국 현실을 넘어서는 거 아닐까요. 삶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건 기록이고, 문학은 상상을 통해 그 너머를 보거나 발견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경수 선배, 그건 마치 이상주의나 환상주의자들을 위한 변명 같은데요."


창훈이었다.


“어설프게 끼어들지 마.”

“저도 알건......”

“넌, 빠지라니까. 헬스장 다니고 힘이나 쓸 줄 아는 네 까짓 게 뭘 안다고?”

"경수 오빠. 오늘 왜 그래?"


수아가 창훈에게 선을 넘는 발언을 하는 경수를 말렸다.


“경수 형, 지금 뭐라고 했어요?”

“넌, 인마, 참견 말라고.”


경수의 급발진에 대화의 온도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창훈이는 경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소진은 그 순간 K의 말투와 표정에 스치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건 지금껏 보았던 K의 표정과 말이었지만, 지금은 더 차갑고 경직된 표정이었다.


“문학은 현실을 똑바로 봐야 해. 아파야 하고, 고발해야 하고, 살을 도려내듯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야 해. 현실이 아닌 건 문학이 아니라 기만이야.”


경수는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처음엔 세계의 이미지를 초월하 듯한 K의 철학과 언어들이 날카롭게 다가왔고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경수는 언제부턴가 마음 한편에서 도발적인 질문이 꿈틀거렸다. 현실을 고발하는 것만이 예술이자 문학인가? 치열함만이 진정성인가? 그렇다면 낭만은, 판타지는.


“하지만 K선배. 우리가 현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독자들이 그 현실에 감정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선배가 말하는 공감과 위로는 리얼리즘 그 이상도 필요해요.”


순간, 차가운 공기 속에서 뭔가 또각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대화의 결이 아니라, 침범하지 말아야 할, 아니 침범당하지 않았어야 할 권위에 대한 도전처럼 느껴졌다. K는 순간 고개를 돌려 경수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온화했지만 날카로웠다. 그것은 마치 ‘네가 감히, 나에게?’ 하는 시선이 은근했다.


“글쎄, 그런 건 예술이나 문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몽상가나 방구석 이상주의자들이나 하는 뻘 소리야. 우리는 모든 곳에서 현실을 직조해 내야지, 어설픈 판타지나 이상주의를 펼치는건 의미없어.”


경수는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위로가 필요했던 건 독자가 아니라, 어쩌면 자기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글을 쓴다는 건 누군가를 위로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K는 테이블에 손을 짚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그걸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어. 사람들은 현실이 싫어서 문학을 읽는 게 아니야. 오히려 그 현실을 문학이라는 자장 안에서 대신 싸워주길 바라는 거라고.”


그 말은 분명 K만의 신념이었다. 하지만 그 속엔 자신을 지탱하려는 의지가 너무나 절박하게 담겨 있었다. 경수는 그 순간, K가 한때는 문학으로부터 위로받았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금의 K는 오직 리얼리즘이라는 형식에 갇힌 채 ‘고발과 응시’만을 말하고 있었다.


“선배가 말한 켄로치의 '빵과 장미', '나 다니엘 블레이크',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다룬 플래툰 같은 영화와 예술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돌오리 드러내고 직시해야 한다는 건 동의해요. 그런데... 문학이 예술이 반드시 투쟁하고 싸워야만 존재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거예요. 가끔은 우리의 나약한 영혼을 도망치게도, 숨게도 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테이블 위는 공허해졌고 시간은 잠시 멈춘 듯했다. 경수와 K의 설전을 듣고 있던 소진, 수아와 소영이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것은 마치 경수가 K앞에서 절대로 꺼내서는 안 될 ‘금기어’를 말한 것처럼. 모두가 말은 없었지만, 그 시선은 분명했다. 경수는 그 시선 속에서 벽처럼 단단한 압박을 느꼈다. 단단하고 차가운 벽. K는 담배를 물었다. 라이터 불빛이 그의 얼굴을 어둡게 비추었다.


소영이가 잠깐 얼어붙은 공기를 읽고는 특유의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이러다 다 시체 되겠네. K선배, 경수 오빠, 싸움은 칼 들고 하는 거지, 말로 하는 거 아녜요~?”


그녀는 일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맥주잔을 들었다.

“자자자~ 우리 모두 다시 건배 한 번 하고, 진지한 얘긴 다음 회차로 미뤄요. ‘문학 치킨 게임’은 다음 주제로!”


그렇게 말하며 소영이는 K 앞에 빈 잔을 채워주고, 경수의 잔도 살며시 눌러 채듯 따라주었다.

“오늘은 내가 심판이야. K선배, 그리고 경수. 둘 다 레드카드야, 알았지?”


분위기를 바꾸려는 억지웃음이었지만, 그 안에는 나름의 배려가 담겨 있었다. 그녀만큼은 누구 하나 상처 입은 채 집에 가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냉랭하게 얼어붙은 대화의 온도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웃음은 금세 식고, 남은 건 술잔 속의 기포가 터지는 소리뿐이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그래요."

"경수군, 오늘 토론 정말 흥미로웠어. 그렇게 훅 들어올줄 예상은 못했지만."


알 수 없던 긴장과 침묵이 흐르는 사이 K가 먼저 자리를 일어섰다. 수아와 시원이가 일어서자 창훈이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모두가 나가고 나서야 경수는 홀로 몸을 일으켰다. 끝까지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듯 컵에 있던 찬물을 연거푸 머리에 끼얹었다.


그날 이후 경수는 K의 말에 종종 반기를 들었다. 강의를 할 때나 술자리에서. 그때마다 창훈이를 포함한 모두는 경수가 아닌 K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것은 어쩌면 새로운 틈이자 균열의 시작이었다.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지는 형국이랄까? 경수는 그런 답답한 시간이 계속될수록 더욱 K에게 각을 세웠다. 마치 부서진 의자에 앉은 듯 삐걱거렸다. 소진은 경수가 K와 미국식 ‘치킨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서로를 마주 보고 달려오는 폭주 기관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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