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모퉁이에서
9화 요약
경수가 문학 동아리방 '벨에포크'에 어렵게 구해온 선풍기가 누군가에 의해 두 동강 났다. 경수는 극도의 분노와 불안감을 느낀다. 다음 날 경수는 학교 정문 게시판에 선풍기 파손 범인을 향한 대자보를 써서 붙인다. 대자보의 마지막 문장, "나의 두 손으로 그대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말 것이오!"는 대자보를 읽던 학생들에게 섬뜩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경수에게 선풍기의 파손은 단순한 기물 훼손이 아니라, 그의 질서와 원칙이 깨진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한편, 소진은 범인이 누구인지 알지만, 이미 그가 벌을 받았다고 생각해 이를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10화. 인사동 모퉁이에서
오후 7시쯤 다시 수아가 병원에 왔다. 총학생회 간부들과 함께였다. 총학생회장과 선전부장을 제외하면 모두 새로 뽑힌 임원들이었다. 오후에 경수의 이모가 병문안을 다녀갔다. 수술을 집도했던 젊은 의사가 두 시간마다 경수의 상태를 확인했다. 차트를 보던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간호사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전달했다. 경은이 수척한 표정으로 병실을 나서는 의사를 붙잡고 언제쯤 경수가 깨어날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젊은 의사는 경은에게 희망고문은 하지 않으려는 듯 목소리는 일정한 속도와 톤을 유지했다.
"선생님, 우리 경수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니겠죠?"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선생님, 얼마 나요?"
"글쎄요...일주일, 더 길면 몇 달이 될 수도 있어요."
"제발 우리 경수 좀 깨어나게 해 주세요."
경수 누나는 병실을 나서려던 의사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말했다. 난처해하던 의사는 소진과 수아가 그녀를 떼어 놓자 병실을 나갔다. 수아가 경수 누나를 부축하여 휴게실로 데리고 나갔다. 경수는 두 눈과 코만 드러낸 채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다. 산소호흡기에 수증기가 맺혀있다. 소진은 왠지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사고 이후의 경수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병실 문이 열리고 멀쩡한 경수가 들어와 "다들 여기서 뭐 하는 거야?"라고 진지하게 물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진의 상상이었다. 병원에 실려 올 당시 택시기사가 간호사에게 건네준 지갑과 핸드폰은 그가 경수임을 증명해 주었다.
이번 주 금요일은 K의 1학기 마지막 강의가 있는 날이다. 강의실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그들 속에서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K가 강의실에 들어오자 학생들은 박수를 쳤지만 묘한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학생들의 환호와 박수에 K는 문 앞에서 한참을 말없이 웃기만 했다. 탁자엔 시원이가 사 온 장미꽃이 안개꽃 속에 수줍게 묻혀 있었고, 강의실엔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하지만 경수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종강 파티는 학교 근처 인사동 모퉁이에서 열렸다. 평소 같았으면 들뜬 분위기였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인사동 모퉁이에 들어서자 낡은 턴테이블과 잡음 섞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소진은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며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두운 조명 아래, 바깥 빗소리와 함께 가라앉은 분위기가 소진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술잔이 몇 번 오가고서야 누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원이였다.
"경수도 여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종강 파티가 조용한 위로의 자리로 변하자, K는 술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한 학기가 끝났군. 하지만 이번 학기는 뭔가 달랐어. 언제부턴가 강의실에서 나를 바라보는 그대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거든. 처음엔 호기심과 기대가 가득했지만, 점차 고민과 질문이 많아졌어. 누군가는 나의 말에서 길을 찾으려 했고, 누군가는 반발하며 자신의 길을 가려했지. 그리고 경수…… 그는 내 말속에서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K는 술을 한 모금 삼켰다. 투두둑. 투두둑. 빗소리가 창밖에서 잔잔하게 퍼졌다.
"경수가 여기 있었다면, 그는 지금 내 옆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었겠지. 그의 자리가 이렇게 허전할 줄은 몰랐어. 어쩌면 나는, 그대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다기보다 혼란을 더 키운 건지도 모르겠어."
K는 조용히 웃으며 다시 술잔을 들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내가 그대들에게 무엇을 남겼든, 그건 이제 그대들의 몫이겠지. 경수의 빠른 회복을 위하 한잔씩 하자."
"경수의 빠른 회복을 위해. 건배."
"건배."
K는 천천히 잔을 기울이며 창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인사동 모퉁이 사장이 엷은 미소를 지은채 K옆으로 오더니 자연스럽게 앉았다.
인사동 모퉁이 사장은 삼십 대 초반의 여자였다. 키도 늘씬하고 갸름한 계란형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정은채였지만, 모퉁이를 찾는 손님들은 ‘제미정’이라 불렀다. 처음엔 K가 그녀의 말투가 꼭 재미교포 같다며 붙인 별명이었는데, 어느새 손님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불렸다. 그녀는 윤기 가득하고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였지만 영업을 할 때는 항상 머리를 묶고 있어서 풀어헤친 모습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화사한 미소를 지었고 흥이 나면 기타를 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하지만 그녀도 오늘은 K와 학생들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듯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수아에게 경수의 사고 소식을 들은 그녀는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앳된 표정의 직원들이 테이블마다 주문을 받으며 돌아다녔다. 동동주와 고갈비가 원형의 원목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오늘따라 술잔을 기울이는 손들이 무거웠다. 빗소리가 창밖에서 속삭이듯 들려왔고, 우리는 마치 그 속삭임에 응답이라도 하듯 조용히 잔을 비웠다. 경수의 빈자리가 이렇게나 크게 느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