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 대로변의 난투극
15화 요약
정교수 승진이 막힌 K는 은사 Y교수에게 분노를 품고, 그를 음해하기 위해 평소 자신을 흠모하던 여학생을 시켜 성희롱 사건을 유도하고 고발 글을 유포한다. 결국 Y교수의 석좌 임용은 취소되고, K는 정교수에 가까워진다. 가을학기 첫 수업에서 K는 『파우스트 박사』를 강의하며 지식에 대한 욕망과 몰락을 설파한다. 강의실은 K의 열정과 열기로 가득하고, K는 학생들의 찬사를 은근히 즐긴다. 이 모든 상황은 K 자신이 파우스트와 닮아 있음을 암시한다.
16. 한밤중 대로변의 난투극
경수와 K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되는 계기는 학교의 축제 마지막 날이었다. K는 다른 대학에서도 강의를 하고 있어서 그동안은 축제에 참석할 시간이 없었다. 사건이 벌어진 그날도 K가 축제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가 넘어서였다. 무대에서 마지막 곡이 끝나자 학생들의 박수와 환호성이 이어졌다. 사회를 맡은 개그맨이 관객들에게 앙코르를 유도했다. 그 사이 옆에 서 있던 K가 소진의 어깨를 살짝 치더니 물었다.
“경수 군은 어디 갔지?”
K는 경수를 언제나 경수 군이라고 불렀다. 우리들이 경수를 회장이라든가 대표라고 스스럼없이 불러대고 K를 교수님이나 언니, 혹은 누나라고 부르는 만큼 그들의 호칭 또한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경수군, K선배라고만 불렀다.
“며칠 고향에 다녀온댔어요. 있다가 올거예요.”
“고향이면 부안? 무슨 일로?”
“여동생 면회 때문에요.”
“경수 군에게 여동생이 있었어. 누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좀... 말하기가.”
“뭔데?”
"여동생이 정신병원에 있어요.""
"근데 모르셨어요?"
"몰랐어."
K는 정말 모르고 있었다는 듯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깜짝 놀란 것은 소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경수의 동생이 십 년이 넘도록 조현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소진은 K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진은 경수 여동생이 전 남자친구의 집요한 스토킹과 가스라이팅을 격다가 자살시도를 세차례나 한 사실을 말해주었다. K는 시종일관 침울한 표정이었다.
“일부러 말하지 않았나 봐요. 경수 원래 자기 얘기 잘 안 하잖아요.”
“......”
축제가 거의 끝나갈 무렵 경수가 도착했다. 우리들은 밤 11시가 넘어서 K와 함께 인사동에서 뒤늦은 술자리를 마련했다. 경수의 모습은 밝고 활기차 보였다. 하지만 경수와 K는 그날따라 말이 없었다. 경수가 조용한 것은 원래 그랬으므로 그렇다 치고 K가 술자리에서 말이 없는 것은 이상했다. 그는 바로 소진 앞에 앉아서 연거푸 술만 들이켰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던 K가 경수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면서 가볍게 그의 머리를 쳤다. K는 술이 취하면 옆에 있는 사람 머리를 만지거나 가볍게 툭 치는 버릇이 있었다.
“여동생이 오래 조현병을 앓고 있다고?”
“네.”
“근데 나한테는 왜 말하지 않았어?”
“좋은 일도 아닌데요.”
아직 술이 덜 들어간 경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도 내게는 말을 했어야지. 우리가 그 정도 사이는 되잖아.”
K는 다시 한번 경수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K는 경수 여동생이 정신병원에 오래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못내 서운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뒤풀이 자리가 끝날때쯤이었다. 소진과 K와 경수가 술집 밖을 나왔을 때는 다들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늘 가던 노래방으로 갔을 것이다. 셋은 한동안 거리에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던 K가 다시 경수의 머리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동생이 마음의 병을 앓았다면서?”
“네.”
경수는 반복해서 묻는 K에게 대답을 하면서 소진을 쳐다봤다.
“인마,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K에게 연거푸 머리를 맞자 경수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 이 새끼 봐라. 똑바로 서.”
“선배 많이 취했어요. 그만하세요.”
“말해봐. 이 새끼야. 너, 도대체 날 뭘로 본거야.”
네온사인이 반사된 밤의 대로변에서 K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두 눈의 동공은 완전히 풀려 버렸다. 눈빛은 잔혹한 살기마저 품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오른손으로 K의 복부를 강타했다. 불시에 복부를 맞은 경수는 숨 쉬기가 곤란한지 몸을 앞으로 숙였다. K의 그림자가 경수 위로 덮치듯 드리운다. 경수는 엎어져 있는 자신을 향해 다시 발길질을 하려는 K를 간신히 붙잡았다.
“경수야, 선배 많이 취했다. 니가 피해라.”
“야, 이 새끼, 너 이리 와.”
“아니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아, 빨리 도망치라니깐.”
경수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는 사이 K가 소진의 팔을 거세게 뿌리치며 경수에게로 달려갔다. 경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달아날 생각도 없이 대로변 한 복판에 그대로 서 있었다. K는 소진이 말릴 사이도 없이 경수를 땅바닥에 눕혀놓고 사정없이 주먹과 발길질을 해 대었다. 저 가냘픈 체구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소진은 지금 경수가 왜 도망가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둘을 중간에 두고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원을 그리며 구경했다. 빠앙, 빵 빵, 차들이 클락션을 울리며 대로변에 엉켜있는 두사람 옆으로 빗겨갔다. 소진은 K와 경수를 떼어놓으려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힘으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경수가 K에게 일방적으로 맞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지금 경수는 K에게 일방적으로 맞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경수를 향해 다시 달려드는 K를 붙잡은 채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노래방에 있었다.
“소진 오빠, 지금 어디야? 왜 노래방 안와.”
“수아야, 지금 일 벌어졌어. 아까 그 호프집으로 와.”
“무슨일인데?”
“급해, 빨리 오라니까. 다른 애들도 같이.”
잠시 뒤 달려온 수아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란것은 뒤에 있던 창훈이와 시원이도 마찬가지였다. K는 여전히 이성을 잃은 채 씩씩 거렸다. 경수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입가에는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수아가 달려가서 물티슈로 입술에서 흘리는 피를 닦아 주었지만 흥분한 상태인 경수는 수아의 손마저 냉정하게 뿌리쳤다. 입안에서 뭔가가 걸리는 듯 턱을 몇 번 씨근덕거리자 부러진 이 두 개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빠, 이가 부러졌어.”
“퉤.”
“일어나, 병원 가야 돼.”
“필요 없어.”
경수는 수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였다. 그의 얼굴과 주먹은 심하게 부어 있었다. 말을 할 때마다 한쪽 귀가 웅웅거린다며 연신 귓구멍을 후벼 팠다. K의 왼손도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다. 소진은 상황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이미 일은 크게 벌어졌지만, 창훈이와 함께 완강하게 몸부림을 치는 K를 양쪽에서 붙잡고 대로변 밖으로 끌다시피 데려갔다. 경수는 바닥에 널브러진채 여전히 움질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수아는 그런 경수 옆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