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등
16화 요약
경수가 여동생의 정신병원 입원 사실을 숨겼다는 걸 알게 된 K는 배신감에 휩싸여 술자리에서 만취한 상태로 거리에서 경수를 마구 폭행을 했다. 경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은채 일방적으로 맞으며 피를 흘린다. 이를 목격한 소진은 충격에 빠져 도움을 청하지만 K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경수와 K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계기가 된다.
17. 가스등
경수는 그날 K가 왜 자신을 그토록 폭행을 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충격이 컸던 것일까? 경수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K는 술이 약하긴 했지만 한밤중 대로변에서 액션 영화를 찍을 정도로 인사불성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K의 행동을 이해 못 하기는 소진도 마찬가지였다. 친동생처럼 아끼던 후배에게 갖는 모종의 서운함이었을까? 그가 경수에게 주었던 일방적 믿음에 대한 배신감이었을까? 그 깊어가던 서운함이 술 김에 참을 수 없는 분노로 표출된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경수를 폭행한 것은 이유가 되지 못했다.
너무나 감정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요람을 흔드는 손처럼, 조지오웰의 빅브라더처럼, K의 몸과 정신을 지배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여동생이 아프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고? 사람은 누구나 밝히고 싶지 않는 비밀이 있다. 매사가 신중한 경수로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악감정이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두 사람의 친밀함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오후에 K는 소진에게 전화를 했다.
"소진, 이상하게 온 몸이 쑤시고 아픈데, 혹시 어제 무슨 일 없었어?"
"정말 기억이 안나시는 거예요."
"화장실을 다녀온 뒤로 아무 기억이 안나."
K는 방금 잠에서 깬 듯 목소리는 잠겨있었고 힘이 없었다. 그는 온몸이 쑤시고 왼손이 부어 있는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전에도 종종 그런 일이 있었으므로 필름이 끊겼다는 그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게..... ."
"왜, 내가 혹시 누구한테 실수라도.... ."
소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날 K가 경수에게 기했던 끔찍한 행동을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K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소진은 수화기를 내려놓았지만 파르르 떨리던 그의 불안한 호흡의 잔영이 오래 남았다. 경수는 월요일 오전에 병원에 입원을 했다. 소진은 수아와 함께 저녁에 병문안을 갔다. 담당 의사의 첫마디는 ‘진단서 끊어드릴까요?’였다. 희미한 형광등 아래 붕대를 감고 창백한 얼굴로 병원 침대에 누운 경수는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왼쪽 고막이 파열되었다. 입술 옆엔 검붉은 피멍이 여전했고 왼손은 부었으며 이도 두 개 부러졌다. 침대 옆에는 방금 출력한 듯 빳빳한 진단서가 놓여있다. 전치 8주다.
문창과 뿐 아니라 다른과 학생들 사이에서도 두 사람에게 벌어진 사건은 한동안 화제였다. K가 몇 차례 병원을 찾아왔지만 경수는 만남을 거부했다. 경수는 입원한 지 보름 만에 퇴원을 했다.
"신고는 안할거야?"
소진은 경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안할거야. 치료비도 충분히 받았고. 무엇보다 후배들에게도 더 이상 창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경수는 K를 경찰에 신고 하지 않았다. K를 용서 했다기 보다는 경수가 당한 폭행의 정서가 애매했다. 애매한 감정의 혼란이랄까. 하지만 둘의 관계는 와르르 깨졌다. 경수는 더이상 K의 수업을 듣지 않았다. 졸업 학점은 다 채웠다. 과 일은 부회장인 수아가 맡아서 했다. 하지만 K는 아직 미련이 남은듯 경수와의 관계를 깨지 않았다. 경수의 집을 찾아가 가기 시작한 것은 한달 쯤 뒤였다. 경수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발신 번호를 바꿔가면서까지 전화를 했다. 수십차례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경수는 핸드폰 번호도 바꾸었다.
"경수군은 어디 있어? 강의도 안 나오는데..."
K는 소진에게 경수의 근황을 물었고 소진은 K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곤 했다. 그즈음 경수에게 일어난 일련의 불행한 사건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경수조차도 그것이 자신의 실수일 거라고 생각했다. 창훈이와의 몸 싸움도 그 무렵이었다. 만취한 창훈이가 늦은 밤 경수의 집을 찾아왔다. 경수의 집 문 앞에서 말다툼과 몸싸움을 벌이던중 경수의 턱뼈에 금이 갔다. 두사람의 몸싸움을 어둔 골목의 가로등 밑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K였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경수는 자신이 점점 미쳐 간다고 여긴 것일까? 경수가 난데없이 대낮에 대로변에서 훌러덩 옷을 벗고 소리를 내 지르며 뛰어다니다 경찰서 유치장으로 잡혀 들어간 것도 그때쯤이었다.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을 향해서 뛰어들려고 한 적도 있었다. 경수를 유심히 지켜보던 역무원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소진과 후배들은 그를 병실이 아니라 장례식장에서 만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수의 돌출 행동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과 관계된 모든 것들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경수의 소형 녹음기에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생활이 녹음 되어 있었다. 언제부턴가 집보다도 더 오래 머물던 도서관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세상에서 기억을 지워야 하는 무엇이 있다면 그 첫 번째 대상이 학교 도서관이라도 되어 버린 것처럼 발길을 끊어 버렸다. 어쩌다 한 번씩 도서관에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시험이랑은 전혀 관련이 없는 이상한 책들을 서너 권씩 대출해서는 며칠씩 집에만 틀어박힌 채 빌려간 책들을 몇 번씩 큰소리로 읽어대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