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17화 요약
경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K의 폭행으로 큰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다. 만취했던 K는 자신이 한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고, 경수는 신고 대신 침묵을 선택한다. 이후 K는 만남을 거부하는 경수를 찾아오며 관계 회복을 시도하지만, 경수는 K를 철저히 차단한다. 그 무렵 경수는 연이은 불행과 정신적 혼란에 시달리며 이상 행동을 보인다. 점차 사회적 관계와 일상에서 멀어지며 극단적인 행동까지 시도하게 된다.
18화. 몰락
K는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포장하는데 능수능란했다. 그는 자기모순의 화신이었다. 유학파 출신에, 훤칠한 외모와 달변. 십년전 유력 일간지에 영화와 문학 두 편이나 당선된 그의 평론은 지금도 평론가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듬해 가장 유력한 문예지에 투고한 단편소설도 당선되었다. 익명의 학회지와 졸업생들의 연구논문을 지도한다는 핑계로 베껴 붙인 표절 논란도 있었지만 특유의 달변과 능수능란한 화법으로 자신에게 향하던 논란들을 잠재웠다. 옥스퍼드 유학 시절 작성한 파우스트를 주제로 한 박사 논문에 대한 의혹은 더욱 심각했다. K의 박사 논문을 검토하던 후배 연구자가 학계 온라인 커뮤니티에 표절 의혹 제보를 올린 후, 영국 대학의 논문 데이터베이스에서 K의 이름은 조용히 지워졌다.
하지만 그것은 K가 이제껏 사람들에게 저질렀던 자기기만과 사기중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소진이 어느 날 우연히 한 호프집에서 친하게 지냈던, 지금은 국내에서 상당히 유명한 고고학과 교수 선배를 만났다. 그는 국내에선 단 세명뿐인 이집트 고고학 전문가중 한 사람이었다.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은 좀 하셨어요?"
"그게 어디 쉽겠냐. 우리나라처럼 고고학에..."
"근데 몇 년 전 제자들이랑 유적지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아니 죽을뻔한 경험을 한번 했었지."
"뭔데요?"
"한 오 년 전이었나. 나는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고고학 박사 과정 중인 제자 세 명을 데리고 브라질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원 한 곳을 탐사했어. 탐사를 위한 준비기간도 상당히 길었고 예산도 많았고 탐사 기간도 보름이 넘었지. 탐사 인원도 두 배였어. 사원의 전설을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
그 선배는 탐험을 하면서 위험했던 기억을 한차례 떠올리더니 모면서를 쳤다. 옆에 있던 사람도 그때의 아찔했던 기억을 떠올리더니...
"아휴, 그때 우리 정말 죽는 줄 알았지."
"그런데 탐사 도중 우리는 수상하면서도 신비로운 동굴을 하나 발견했어. 그곳은 지도에도 없는 동굴이었지. 그렇잖아. 호기심은 항상 나 같은 인간들을 불안과 두려움이 동반되는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것을. 당연히 위험도 따르지. 우리를 미지의 동굴 안쪽으로 이끌었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빛은 줄어들고 주변은 온통 깜깜했지. 동굴 가장 안쪽엔 세상에 없는 금은보화가 가득할 것만 같았어."
"저, 그 이야기 알아요. K선배가 우연히 발견했다던 그 동굴 말하는 거죠? 근데 그때 교수님은 제자들과 다른 곳에 있었다고 했어요."
"에이, 무슨 소리야. K는 그때 우리 탐사팀에 있지도 않았는데..."
"그럼 그때 그 동굴에서 가져왔다던 보물도 거짓말이었겠네요?"
"보물? 아! 그거. 보물은 맞지? 근데 그 보물은 우리가 마음대로 가져 올수 있는게 아니야."
"우리가 아무리 고고학 탐사를 하지만 다른 나라의 보물을 함부로 가져올순 없지."
"하긴 그렇네요."
"K 그친구는 상상력이 풍부해. 그러니까 소설도 쓰지."
"네? K는 교수님이랑 자주 탐험을 했다고 하던데요. 아니에요?"
"딱 한번..... 그 친구가 하도 졸라대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 탐사할 때 같이 간 적은 있었지. 그때도 뭔가 이상하긴 했어. 자기가 발견한 것처럼, 주인공인 것처럼."
"그랬어요, 친했어요?"
"친했지. 영민하고 똑똑하고... 그런데 언젠가 그 친구 허영심이 자기를 갉아먹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도 자기 경험담처럼 말했나 보군."
K는 필요하다면 그가 아는 사람들의 과거를 훔쳐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믿게 만드는 그의 현란하고 능숙한 화술은 충분히 그럴듯했다.
한편 소진에게 메일 회신이 왔다. 이번엔 소냐에게서 온 메일이 아니었다. 옥스퍼드 대학 측에서 소진에게 보낸 회신 메일이었다. 소진이 보름 전 Y대 교무부장의 요청으로 옥스퍼드에 K의 영문학 박사 학위 취득 여부 문의 메일을 보냈었다. 대학 측에서도 K에 관한 괴이한 소문들이 학내에서 점점 번지자 확인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메일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소진은 손이 떨려서 마우스를 바닥으로 떨어트릴 뻔했다. K의 선한 미소 뒤에 숨어있던 얼굴이 하나 둘 드러날수록, 소진의 가슴엔 두려움이 아닌 분노가 차올랐다
K의 피해자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K의 옥스퍼드 시절 후배였던 한 피해자는 K에게 당했던 '소름 끼치는 가스라이팅 경험'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밤마다 울면서 K에게 보냈던 메일은 그가 얼마나 K가 철저하게 자신을 심리적으로 지배하며 농락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며칠간이나 밤을 새워가면서 완성했던 자신의 논문을 K 이름으로 제출했던 일, 그리고 더 이상 K의 가스라이팅을 거부하자 주변인들을 이용하여 자신을 정신과에 입원까지 이르게 한 경위를 세세히 고발했다.
그 뒤를 잇는 또 다른 유학생들의 크고 작은 피해 사례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오래전 벨에포크 이전의 디딤돌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하다가 사라졌던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이런 증언들은 K를 가운데 세워둔 채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정확했고, K는 그 중심에서 침묵으로만 일관했다.
며칠 후 소진은 소냐로부터 K의 파우스트 박사 논문 표절 증거와 피해자들의 유학생 관련 자료를 받았다. 소진은 소냐의 메일 속 자료를 확인할수록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어쩌면 K는 그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악마성에 물든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알면 알수록 K의 이중적인 면모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경수는 K의 마지막 가스라이팅 피해자이면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소진은 서양 속담과 세익스피어의 말이 스쳐갔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악은 종종 선의의 옷을 입고 나타나 우리를 유혹한다."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익명의 한 인물이 K의 과거 행적과 현재까지의 기만적인 행동을 폭로하는 대자보를 학내 게시판에 게시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진 않았지만 K는 알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2011년 옥스퍼드, 그리고 Y대학교 창작 동아리 회원이라는 흔적을 남겼다. 그의 대자보에는 K가 강의에서 자주 했던 말들을 인용하며 그의 위선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K의 옥스퍼드 박사학위는 거짓이었다.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학교 차원에서 진상 조사단이 꾸려졌다. K를 향한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다. 학내 외에서 K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졌다. 그의 강의는 폐강되고 예정되었던 정교수직도 취소되었다. 그가 출연하던 방송도 모두 취소되었다. 그가 기만과 거짓의 성으로 쌓아 올린 명성과 지적 권위가 무너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