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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적 고민. 20화

개구리 죽이기

by 김인철

19화 요약


경수의 누나는 경수가 택시에 뛰어들기 전 소진과의 대화를 녹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진은 경수 누나가 전해준 녹음 파일을 통해 그날의 대화를 다시 듣게 되고, 경수가 왜 택시에 뛰어들었는지를 추적하며 자신이 무심코 던진 말들이 경수가 택시에 뛰어들도록 한 게 아닐까 불안해한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드러난 경수의 혼란과 고통, 그리고 K라는 인물이 지닌 지적 권위와 심리적 지배의 실체가 서서히 밝혀지며, 소진 또한 자신이 그동안 외면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20화 : 개구리 죽이기


소진은 경수의 녹음을 다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을 했다. 하지만 그날 경수가 택시에 뛰어든 것은 여전히 의문이었다. 약속 시간이 지났지만 제보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소진은 그녀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젯밤이나, 오늘 아침, 약속 장소로 향하던 지하철 안에서 마음을 바꿨을지도 모른다.


이십 분이 지났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카페 안쪽 테이블은 한산했다. 카페는 붉은 벽돌 외벽과 회색 커튼이 어우러진, 조용하고 클래식한 분위기다. 소진은 즐겨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후 그동안 K와 경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푸른 수첩에 정리했다. 그러면서도 소진은 핸드폰을 응시한 채 제보자에게 카톡이나 전화가 왔는지 재확인했다. 약속했던 시간에서 삼분이 지났다. 소진은 점점 초조해졌다.


소진은 결국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녀는 가장 결정적인 제보자였다. 사십 분이 지났다. 그녀는 결국 오늘 나타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오십 분이 다 될 무렵 소진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 한 여자가 카페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불안한 시선으로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눈매가 K와 닮았다. 그녀는 소진이 있는 쪽으로 왔다.


"혹시.... 김소진 씨?"

"네 맞습니다. 제가 김소진입니다. 강여진 씨 되시죠?"

"네."

"죄송해요. 많이 늦었죠. 집에 휴대폰을 놓고 오는 바람에... 배터리도 없어서 연락을 못 드렸어요."

그녀는 단정한 이미지였다. 긴장한 듯 음성은 약간 떨렸고 모종의 결심을 한 데서 나오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소진과 그녀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기현 오빠가..."


소진은 K의 본명이 기현이라는 사실을 처음 들었다.


"K의 본명이 강기현이었군요. 저는 강지석으로 알고 있었는데..."

"네, 오빠의 첫 번째 이름은 강기현이었어요. 두 번 개명을 했어요. 강건우, 강지석... 지금은 그냥 이니셜 K로만 부른 다죠?"

"네, 저희는 그렇게 불러요."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주문한 아이스티가 나왔다. 목이 탔는지 아이스티를 연거푸 두 번이나 들이켰다.


“오늘 용기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시겠지만 좀 심각해요. K에 관해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특히... K의 가족 이야기에 대해서.”


그녀는 잠시 창 밖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저도 오빠와 연락 안 하고 산지 오래되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오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아요. 잊을만하면 방송에 나오고 신문에도 나오니까요. 오빠는 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거든요. 똑똑한 사람, 천재, 달변가... 뭐, 그런 식으로."


하지만 오빠는 우리 가족 안에서는... 말하자면 모든 걸 통제하려는 사람이었어요. 어렸을 땐 부모님 눈치라도 봤지만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부모님까지도 통제하려고 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이었죠?”

"개구리 죽이기."

"개구리 죽이기?"

"오빠는 산에서 개구리나 곤충 같은 것들을 잡아와서는 나와 동생들에게 날개나 다리를 뜯게 했어요. 그러면서 개구리나 곤충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

"우리가 싫다고 하면.... 오빠는 돈이나 다른 걸로 회유했어요."


소진은 돈으로 회유했다는 말을 듣자. K가 몇 년 전 자신에게도 돈으로 회유하려던 것을 떠올렸다.


"K는 돈이 많은 것 같더군요."

"오빠는 부모님 전재산을 가로챘어요."
"전 재산을요?"

"네... 저와 동생에겐 한 푼도 주지 않았어요."

"자녀분 유류분이라는 게 있을 텐데요."

"오빠는 아버지가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았어요. 전 재산을 오빠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장을 쓰기 직전까지 아버지를 계속 설득했어요.
‘가족끼리 다툼 없이 오빠가 관리하면 좋다’, ‘내가 제일 책임감이 있다’는 식으로요.”

"게다가 전관예우 변호사를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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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은 조용히 작성하던 메모를 멈췄다.


"아버지 유산이 얼마나?"

"오빠가 다 가져가버려서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시골 선산 삼만 평, 논 50필지, 주식, 강남 건물 두 채…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백억은 넘을 거예요."

"와 상당한 재산이네요."


소진은 백억이라는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K가 돈이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백억 대 이상의 부자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결국, 그 많은 부모님의 유산을 오빠가 전부 가져갔다는 건가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는 늘 말했어요. 유산 상속은 아버지 뜻이었어. 아버지는 너희들보다 똑똑한 나를 더 믿었으니까. 시골선산과 서울 변두리 오 층짜리 상가 건물 하나뿐이던 아버지에게 주식도, 논도, 강남의 건물도 사게 한건 다 내 덕분이잖아. 너희들도 그 덕에 해외 유학까지 다녀올 수 있었잖아. 그러니까. 아버지 재산엔 욕심부리지 마. 유산은 모두 내 거야. 아버지도 인정하셨고."


소진은 그녀의 말을 듣다가 잠시 숨을 멈췄다. 듣기만 해도 영혼이 잠식당할 것 같은 익숙한 말투였다. 그녀는 바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잠시 정신이 돌아오셨을 때 남긴 메모예요. 남동생이 몰래 챙겨놨어요.”

"여진아, 기석아. 미안하다. 아빠도 어쩔 수 없었어. 기현이는 정말 무서운 아이야. 억울하겠지만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마. 그게 너희들이 살 수 있어."

"이전의 피해자들은 어떻게 됐어요?"

“오빠가 아버지 전 재산을 가로채고 한 일 중 하나가 그 돈으로 입을 막는 것이었어요. 돈 받고 침묵한 사람들... 그걸로 오빠는 피해자들을 회유했어요. 오빠가 더욱 영악한 건, 오빠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피해자들이 받아들일 액수를 기가 막히게 계산해 낸다는 거예요.”


소진은 K에게 피해를 봤지만 증언이나 그가 받은 피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던 사람들의 말을 떠올렸다.


“그 사람? 글쎄요. 그 사람 때문에 힘든 적도 많았지만... 그때 그 장학금이 없었으면 전 학위도 못 받았을 거예요. 그 사람 덕에 전 여기까지 왔고요. 그게 나쁜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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