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의 시간
20화 요약
소진은 K의 여동생 강여진을 만나 K의 본명이 강기현이며, 두 차례 개명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진은 어린 시절 K가 동생들에게 개구리와 곤충을 학대하게 시키며 통제력을 행사했던 충격적인 기억을 털어놓는다. 또한 K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조종해 전 재산을 독차지하고, 그 유산으로 피해자들을 회유해온 정황도 밝혀진다. 여진은 아버지가 정신을 잠시 되찾았을 때 남긴 메모를 보여주며, K의 본질이 이미 가족에게도 공포였음을 증언한다. 소진은 점점 더 K의 실체에 다가가고 있으며, 그가 쌓아온 권력과 조작의 진면목을 마주하게 된다.
21. 파우스트의 시간
자정은 파우스트 시간, 신데렐라의 시간이다.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빼앗긴 한 인간의 육체는 먼지처럼 사라지고, 왕의 궁정에서 아름답고 화려했던 모습의 신데렐라는 원래의 지리멸렬한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그 파우스트의 시간에 경수가 깨어났다. 경수의 누나가 놀란 목소리로 경수의 엄지손가락을 가리켰다. 하지만 소진은 그녀의 착각일거라고 생각했다. 경수의 왼쪽 엄지발가락이 짧게나마 움찔했을 때도 그것이 무의식의 강을 넘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모두의 시선은 경수를 향했다.
경수는 어렵게 한쪽 눈을 깜빡였다. 이어서 양쪽 눈을 깜빡였다. 생사의 경계에서 메피스토펠레스의 성난 사자머리와 사투라도 벌이는 것일까. 아니면 머리가 다섯 달린 지옥문을 지키는 개와 한데 뒤엉켜 있는 것일까? 경수의 불규칙하던 호흡은 점점 확실하고 또렷해진다. 호흡기에 맺히는 수증기의 양도 늘고 있다. 경수의 희미하던 맥동이 다시 힘차게 튀어 오른다.
“경수야.”
“경수 오빠.”
"경수 선배."
경은은 아직 의식이 불분명한 경수의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있다. 뒤에 있던 소진도 모르게 자신의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그때였다. 번쩍. 마치 밤새 시달리던 악몽에서 깨어나듯이 경수가 두 눈을 떴다. 병실에 있던 모두가 놀랐지만 소리를 죽였다. 드디어 메피스토펠레스의 저주가 풀린 걸까. 자정의 시간. 신데렐라의 축복일까. 젠장 할,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중요한 것은 경수가 깨어났다는 사실이다. 모두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고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서 경수가 살아 돌아 온 것이다.
“깨어났어요. 우리 경수가 살았어요.”
“어디...어디... .”
“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경수 누나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주체 할 수 없을 정도의 격정과 희열, 그리고 잠시 숨고르기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병실의 사람들은 담당 간호사를 호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아가 황급히 비상 호출 버튼을 눌렀다.
“오빠, 나야. 수아. 나 알아보겠어?”
“.........”
수아가 경수를 애타게 불러댄다. 하지만 경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입을 다문 채 눈만 깜빡 거릴 뿐이다. 초점을 잃은 시선,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만 깜빡거린 채 누워있다. 벽, 기둥, 천장과 침대. 경수는 주위의 사물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흰 안개꽃을 담은 베이지색 화병을 바라보던 경수는 모든 것을 처음 보는 듯 한 표정이었다.
창문에서 시계로, 벽에서 커튼으로, 수아에게, 경은으로, 시원을, 다시 창문으로 이어지던 경수의 시선이 침대끝에 선 소진을 향했다. 경수는 소진을 응시했다. 당신은 누구냐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고. 하지만 묻고 싶은 사람은 소진이었다. K와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날 왜 그랬냐고. 서로를 바라보며 대답 없는 물음만 주고받았다. 경은이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일까? 수아는? 알아보는 걸까? 경수의 볼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더니 주치의가 들어왔다.
“방금 깨어났어요.”
경수의 동공을 살피고 맥박을 확인하던 의사는 한시름 놓은 표정을 짓는다. 그도 역시나 인간이었을까. 그의 소독약 냄새 짙은 흰 가운에서 몇 번 경험하지 못했을 기적을 대하는 순간의 표정은 확실히 달랐다.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병실엔 경수 누나만 남았다. 소진은 집에 오자마자 무참히 방바닥에 쓰러졌다. 긴장이 풀리자 참았던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던 모양이다. 다음날 오후가 되도록 늘어지게 잠을 잤다. 벨소리에 눈을 떴지만 가위라도 눌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그만 액정 속에 찍힌 번호는 낯이 익었다. 오래된 전화번호. 그것은 K의 것이 틀림없었다.
경수는 일주일후 퇴원을 했다. 처음엔 모든 것을 낯설어 하던 경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기억을 되찾았다. 수아, 소진, 창훈이, 시원이도 서서히 경수의 잃어버린 기억을 비집고 들어앉았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경수는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해 냈다. 단 K의 일만을 제외하고.
"한 사람만 기억 못할수도 있나요?"
"특이한 케이스지만 없지는 않습니다."
의사는 부분 기억 상실이라고 했다. 부분 기억 상실? 백발이 성성한 노 의사의 말처럼 정말 그랬을까? 시계를 잃어버리듯이, 지갑을 떨어트리듯이 어떤 기억은 그렇게 쉽게 사라져 버리는 걸까? 유실물 센터에서 잃어버린 카메라를 찾듯이 기억을 되찾을수는 없는걸까. 하얗게 낀 기억속의 먼지가 골목을 휘감은 안개처럼 두텁다. 기억속의 먼지는 모래처럼, 바위처럼 파랗게 일렁이는 강물 속으로 가라앉아버리기를. 우연히 서랍 속에 묻혀 있던 수첩 하나가 보인다. 강물처럼 파랗던 수첩은 오래되고 낡았다. 무심코 펼쳐본 수첩 속에는 귀에 익은 말이 적혀있다.
‘사람들은 늘 무언가를 잃어버려. 우산을 잃어버리고, 반지를 잃어버리고. 과거를 잃어버리고 꿈도 잃어버려. 한동안 상심에 젖지만 곧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삶은 계속되지. 그렇지만 그게 전부일까? 아닐거야. 우리는 단지 그 상황에 익숙해질 뿐이야. 끔찍한 경험은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이거든. 어릴 적 술 취한 아버지에게 허벅지를 칼부림 당하던 기억처럼, 집에 오는 길에 얻어 탔던 트럭 운전수의 검은 물건을 핧아야 했던 끔찍함처럼,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그 날의 상처는 잊지 못하듯이. 그러므로 무언가를 잃어버리기 전까지 그것은 잊어버린 것이 아니야.’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문장과 필체, 그것은 바로 칠년전 소진이 K의 말을 받아서 쓴 글이었다. 어쩌면 지금 경수는...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기억하지 않으므로 기억해야 하는 순간의 고통을 극복하듯이. 그 알수 없는 고통이 경수에겐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이미 K가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어떤 상황을 잃어 버렸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는 한 그것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그것이 고통이든 기쁨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