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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적 고민. 22화

기억과 회복

by 김인철

21화 요약


자정이자 파우스트의 시간에 경수가 의식을 되찾는다. 경은을 비롯 모두가 안도하지만, 경수는 처음엔 누나와 친구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경수는 서서히 기억을 회복한다. 하지만 K와 관련된 기억만은 찾지 못한다. 소진은 경수가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잊고 싶어 하는 것임을 느끼고, 과거 K가 했던 말들을 적은 오래된 수첩 속 글에서 그 진실의 단서를 발견한다.


22화 : 기억과 회복


K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거울 앞에 섰다. 몸은 근육질에 탄탄했지만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볼은 움푹 들어갔고 두 눈 밑은 시퍼렇게 꺼져 있었다. 불면에 시달렸다. 밤마다 그를 찾아오는 환영 때문이었다. 그가 통제하고 지배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이젠 K를 에워싼 채 옥죄고 있었다.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본능이었다. 할 말을 잃은 채 입술만 부르르 떨던 유학생, 자신이 갈기갈기 찢어버린 논문을 든 채 부들부들 떨던 손, 칠 년 전 학교 건물 옥상에서 투신하기 전 '자신에게 왜 그랬냐?'며 문자를 보내던 소진. 백억이 넘는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던 아버지, 유산 문제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두 동생들, 의식을 잃고 병실에 누워있던 경수. 누구보다 자신을 추앙했지만 이제 깊은 나락으로 끌어내리려고 하는 소진.


"소진, 자네는 날 어디까지 끌어내릴 셈이지?"


교내 익명 게시판에는 K의 실명을 언급한 고발 글이 올라왔다. 학회 내부에도 제보가 쏟아졌다. 의혹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K는 고발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소진이었다. K는 다음날 아침 자신의 강의가 폐강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징계위원회 소집 통보도 받았다. 징계 사유는 성희롱과 경수의 폭력 교사혐의였다.


pixabay


소진은 어두운 조명아래 USB 하나를 들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USB를 노트북에 꽂았다. 벨에포크라고 적흰 폴더를 클릭하자 수십 개가 나타났다. 첫 번째 폴더엔 독일 유학 시절 K의 연구실에서 일했던 유학생 영상이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지도 교수라는 사람이… 저를 무참히 짓밣았어요. 때리고 부수는 폭력 없이 말 한마디, 언어 하나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그 독일 유학생의 영상을 보는 동안 소진은 손끝이 떨렸다. 소진이 7년 전 느꼈던, 정신이 조각조각 붕괴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USB의 마지막 폴더엔 경수의 이름이 있었다.


“경수도, 독일 유학생과 같은 방식이었어요. K는 사람의 마음을, 정신을 조각처럼 만들어버려요. 자기 뜻대로 조종하고 부수고, 다시 붙이고…”


소진은 노트북을 닫고 눈을 감았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던 밤이 그의 정신을 멍하게 했다. 이제 끝낼 시간이었다. 그날 오후 K는 소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K. 아니 기현인데, 한 번 만나지. 마지막으로.”

기현. 강기현. K는 처음으로 소진에게 자신의 본명을 말했다. 소진은 K의 본명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의 입에서 기현이라는 이름을 듣자 기분이 묘했다. 소진은 기현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내일 오전, 연구실에서 볼까?"

"아니요, 금요일 오후 다섯 시."

"어디서?"

"벨에포크에서요."

"아~ 거긴. 그래 좋아. 거기서 만나지."


금요일, 소진은 정각 다섯 시에 벨에포크의 문을 열었다. 그는 문턱에서 잠시 숨을 멈췄다. 벨에포크는 정돈되어 있었지만 먼지가 쌓여 있었다. 논쟁과 토론, 창작열로 생생하게 살아있던 공간이 한 달 만에 폐허처럼 변해있었다. 벨에포크라는 이름처럼 아름다운 시대는 이제 사라졌다. 갈라진 회색 타일, 거미줄과 먼지 낀 창틀, 책장에 나란히 꽂힌 서적들 위엔 지난 시간들이 두텁게 묻어 있었다.


‘잃어버린 사실을 잊지 않는 한,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게시판에는 K가 자주 인용하던 말들이 적힌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먼지 수북한 테이블 위엔 빈 컵이 하나 있었다. 그 안의 얼룩은 닦이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소진은 그 얼룩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K가 벨에포크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먼저 와 있었네."

"네. 솔직히 좀 기대했거든요."

"뭘?"

"선배와의 진실한 대화를요."

“솔직히, 자네가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줄은 몰랐어. 다른 사람들은 다 실패했거든. 난 그들의 시도를 즐겼고.”


소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지? 날 증오하며 무너뜨리겠다고 마음먹은 게. 내가 경수를 자네 대타로 점찍은 날부터인가? 결국 자넨 날 잊지 않았고, 경수는 날 기억에서 지웠지.”

“전 선배를 증오하지 않았어요. 단지 잊지 않으려 했을 뿐이에요. 누군가는 당신이 한 짓을 기억해야 했으니까.”


K는 피식 웃으며 그가 늘 앉던 소파에 앉았다.


“내가 뭘 어쨌는데... 나는 그저,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을 강하게 만들고 싶었어. 내가 나의 시절을 견딘 것처럼. 세상은 약자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니까.”


소진은 K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는 가족들에게도 참 못할 짓을 많이 했더군요."


K는 처음엔 놀란 듯했지만 예상했다는 듯이 말했다,


"동생들을 만났군. 예상은 했어. 설마 다 믿는 건 아니겠지."

“이제 몰락의 시간이 멀지 않은 것 같아. 예상을 못한 건 아니야. 믿지 않겠지만 나는 스스로를 멈출 수 없었어. 어쩌면 누군가 나를 멈춰주길 바랐는지도 몰라. 그리고 결국, 나를 무너뜨린 건 자네였어.”


소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선배는 스스로 무너졌어요. 선배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던, 그 이유로 타인을 망칠 권리는 없어요. 알고 싶지도 않고. 그건 가스라이팅이에요. 폭력이죠. 선배가 칭송하던 파우스트 박사처럼. 악마가 아닌 스스로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거죠.”


며칠 뒤, Y대학교는 징계위원회를 열었다. K는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징계위원회에 불참했다. 그는 만장일치로 부교수 직에서 파면되었다. 언론은 그가 발표한 논문들에 대한 표절 의혹을 보도했고, 그의 피해자들은 차례로 언론과 기자들 앞에 섰다. 누구도 그를 변호하지 않았다. K는 조용히 캠퍼스를 떠났다. 그 누구의 배웅도 없이. 그리고 며칠 후, 그는 경찰서에서 경수와 또 다른 피해자의 폭력 교사혐으로 소환장을 받았다.



소진은 경수에게 빨간 수첩을 건넸다.


“경수야. 이 빨간 수첩, 기억나?”


경수는 한참 동안 수첩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 그리고 이제... 기억할 수 있어. 그날의 목소리도, 냄새도, 손의 떨림도.”


소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마치 시간도 호흡을 멈춘 듯했다.


“K를... 용서할 수 있겠어?”


경수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나 자신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날 밤, 소진은 창가에 앉아 술을 한 잔 마셨다. 칠 년 전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어깨를 눌렀지만 조금은 가벼워졌다. K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경수의 기억은 회복했다. 소진도 회복되고 있었다. 소진은 모든 것을 기록하며 여기까지 왔다. 7년 전 그 끔찍했던 기억도 서서히 잊히고 있었다. 멀리서 새벽 종소리가 울렸다. 소진은 취기가 있는 상태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열린 창 사이로 바람이 불고, 책상 위 수첩의 한 페이지가 휘리릭, 소리를 내며 넘겨졌다. 그 문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잃어버린 사실을 잊지 않는 한,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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